얼마 전에 이외수 씨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화제가 됐습니다만, 이번에는 황석영 씨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합니다. 이미 녹화는 끝냈고 다음 달 중순 쯤에 방영된다고 하는데, 프로그램 관계자 분의 말씀에 따르면 역시 문학계의 '조선의 3대 구라'답게 입담은 예술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말이 너무 길어서 편집하기가 괴로울 것 같다더군요. 아무래도 방송에서는 좀 짧게 짧게 끊어지는 게 편집하기도 좋고 듣기도 편할 테니까요.

그런데 황석영 씨의 출연을 두고 좀 까칠하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오늘 경향신문을 보니까 황석영 씨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것을 비판하는 눈길로 보는 칼럼이 올라와 있더군요.

관련 기사 : [문화속으로]왕비호, 이외수 그리고 황석영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뒤 뭔가 개운치 않다. 그건 내가 이미 한물간 386세대이기 때문이라고밖에는 해석이 안되는데 적어도 황석영은 ‘무릎팍도사’에 안나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를 아는 동시대의 많은 독자들은 소설 ‘객지’ ‘장길산’ ‘무기의 그늘’을 읽었고 그가 최초로 기록한 판금서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통해 광주항쟁의 전말을 알았다. 그가 인생을 던져 방북길에 올랐던 일과 그 이후의 망명·투옥 등의 고초를 기억한다. 그리고 출옥 이후 세계문학을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적 가치를 모색하는 소설들을 따라가면서 읽고 있다.

- TV출연에 왜 호감 안갈까 -

지난해 대선판도에서 그가 보수와 진보라는 해묵은 대결구도에 균열을 내려고 시도했을 때 많은 기대가 모아졌다. 여전히 그의 발언이 궁금한 독자들이 많다. 말의 무게를 위해 새로운 독자들과의 소통이 ‘무릎팍도사’를 통해서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라도 그냥 ‘무력하게’ 책과 인쇄매체, 교양프로그램의 영역에 머물러줬으면 하는 건 너무 구태의연한 생각일까.

살살 돌려서 얘기합니다만, 그냥 요약하자면, '진지한 명작을 쓰신 대 소설가가 뭐하러 그런 질 낮은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냐'는 거죠. 칼럼 마지막을 '너무 구태의연한 생각일까'라고 맺었는데, 네, 확실히 구태의연한 생각입니다.

사실 순수예술, 고급예술, 뭐 이런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한 발 아래로 보던 대중문화에 접근하는 일은 초기에는 종종 논란을 일으키곤 합니다. 가수 이동원 씨와 <향수>란 노래를 함께 불었던 테너 성악가 박인수 씨도 이 일 때문에 클래식 쪽에서 꽤나 비난에 시달렸다고 하죠. 하지만 <향수>란 노래는 무척 좋아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고 지금도 가끔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스테디셀러가 됐지요. 외국에서도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 덴버가 함께 부른 <Perhaps Love> 같은 노래야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라 있고, <파바로티와 친구들> 같은 프로젝트가 큰 반향을 얻고 팝페라와 같은 장르도 나타나면서 지평이 많이 넓어졌습니다. 물론 크로스오버가 인기를 끌면서 반대로 순수 클래식은 더욱 위축되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위 칼럼을 쓴 분처럼 황석영 씨의 소설을 좋아하는 팬 가운데에는 어쩌면 '왜 그런 저질 예능 프로그램에?'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이 저질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출연자 폭이 넓지 않다는 겁니다. 방송국 개편철이 되면 수십 수백 가지 기획안들이 제출됩니다. 물론 거기서 정말 극소수만이 결국 방송으로 제작되는데, 탈락되는 기획안들 중에서는 기획안 자체가 별로인 경우도 많지만 기획안은 좋은데 현실성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섭외 문제가 꽤 비중이 크죠. 뜻밖의 인물들이 꽤 나온 <무릎팍도사>도 여전히 연예인 범주를 벗어나면 섭외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만약 각계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적절한 포맷을 갖춘 예능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내민다면 그에 걸맞는 기획안들도 더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 가운데 방송으로 만들어지는 프로그램들도 여럿 생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능 프로그램의 질도 많이 좋아질 겁니다. 당장 황석영 씨 한 번 출연했다고 <무릎팍도사>의 질이 확 올라가지는 않겠지만 길게 보면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다고 황석영 씨의 '질'이 떨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작품 활동은 안 하고 예능 프로에만 정신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타노 다케시 같은 경우에도 우리 관점에서 보면 그야말로 '저질 가학'을 일삼는 코미디언이지만 영화 작품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듯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예술가든 문학가든 '작품'으로 다 결론나게 되는 법입니다. 설령 황석영 씨가 <1박2일>에 나와서 까나리액젓 마시고 바깥에서 새우잠 자고 그래도 그 다음에 걸작을 내놓으면 누가 뭐라고 할까요? 물론 그런 분들이 영화배우들 홍보하려고 예능 프로 한바퀴 돌듯이 굳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자기가 자진해서 나가겠다는 데 굳이 그걸 태클 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MP4/13

BLOG main image
Drive with your sense. by MP4/13
Add to Technorati Favorite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02)
광속질주 (205)
취생몽사 (160)
주지육림 (3)
독서삼매 (10)
음담패설 (28)
전광석화 (146)
우매상자 (66)
포장후면 (20)
악마사전 (6)
팔도유람 (20)
혹세무민 (508)
일상포착 (30)
Total : 3,916,089
Today : 578 Yesterday :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