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사장'이란 말 아시나요? 보통 사기꾼들이 많이 쓰는 수법인데, 사기를 목적으로 회사를 차리면서 대표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내세웁니다. 이런 사장을 '바지사장'이라고 하죠. 그래서 사기를 치고 법망에 걸려들게 되면 사기꾼이 아니라 바지사장이 처벌을 받게 됩니다. 물론 바지사장들은 이런 걸 알고 있으며 처벌을 대신 받는 걸 조건으로 두둑한 보수를 약속 받습니다.

그동안 시끄러웠던 KBS 새 사장으로 이병순 KBS 비즈니스 사장이 임명되었습니다. 정연주 사장을 해임하고 사장을 임명하는 과정이 늘 그랬듯이 그야말로 밀실에서 밀어붙이기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청와대 비서실과 KBS 이사장, 그리고 사장후보였던 김은구 씨가 몰래 만났다는 사실까지 들통났습니다. 이 바람에 1순위로 꼽히던 김은구 씨가 탈락당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좀 낯선 이름인 이병순 씨가 누구냐에 대해서 여러 얘기가 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가 누구인가가 중요할까요? 아니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선정되었는지가 중요할까요? 시간을 돌려서 참여정부 때로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철도청이 공사화되면서 사장으로 앉은 사람이 이철 씨입니다. 이 사람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는 점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민주투사'란 점을 늘 강조해 왔습니다. 자신이 박정희 시대 민주투사의 대표로 위임이라도 받은 듯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 씨를 돕는 포용력까지 과시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앉고 나서 보여준 모습은 웬만한 악덕 기업가 저리가라였습니다. KTX 여승무원들을 철저하게 기만하고 그들이 길거리로 내앉게 된 원흉이 바로 이철 씨입니다. 독재자의 아들 박지만은 용서해도 KTX 여승무원들은 용서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이철 씨의 놀라운 '변신'을 보면서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가?'란 의문이 들었습니다.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그 사람이 예전에 뭐였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다'였습니다. 정권의 부름을 받고 정권의 뜻에 따라서 낙하산으로 내려간 낙하산 사장은 결국 정권의 뜻을 충실하게 구현할 뿐입니다. 그가 예전에 군사독재의 앞잡이였든,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였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의 모습을 보면 낙하산 사장 정도가 아니라 한술 더 떠서 바지사장으로 가고 있는 판입니다. 실제로 내각이든 여당이든 자기 소신을 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들 이명박과 청와대의 조종을 받는 바지사장의 모습을 보일 뿐, 뭔가 엇나가는 모습을 보이다가는 바로 한 대 맞고 고개 푹 숙이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요. 원래부터 소신이고 뭐고도 없는 사람들을 앉혀 놓기도 했지만 그나마 소신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던 사람들도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는 그런 모습이 싹 없어지고 그냥 이명박이 드리운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 모습입니다. 지난 정권에서 대통령하고 맞장 토론까지 했던 검찰이 요즘 하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렇죠. 비난이 쏟아지면 강만수 이동관 어청수처럼 가장 많은 비난은 받은 충견들은 오히려 끝까지 감싸고 돌면서 희생양 한두 명 자르고 뭉개버립니다. 낙하산 사장에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전형적인 바지사장 수법입니다. 정부와 여당은 'KBS의 방만경영과 편파방송'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만, 이미 환율관리 실책으로 엄청난 돈을 까먹은 강만수 장관의 국가 방만 경영에 대해서는 싸고 돌기만 하는 판이고, 편파방송 문제도 정부와 여당이 그렇게 사랑하는 조중동보다 KBS가 신뢰성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언제나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별달리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론 정부 여당과는 반대 방향으로 KBS의 보도 태도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이 많습니다만, 적어도 이명박 대통령 말처럼 '다시 태어나야 할' 언론은 KBS보다는 조중동이 먼저입니다.

물론 '정연주도 참여정부의 낙하산 아니었는가'란 반론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임기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사장 선정 과정에서 투명성이 확립되었다면 정연주 사장은 마지막 낙하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정권의 방송장악 시나리오 속에서 정연주 사장은 해임되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낙하산이 이를 대체하는 판입니다. 그 낙하산에 매달린 사람이 누구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바지사장일 뿐이니까요. 바지사장은 그저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의 요구에 충실하게 따라 주고 덤터기 쓸 일 있으면 혼자 다 쓰면 됩니다. 사실 정연주 사장 해임은 그 뒤를 잇는 사장에도 강력한 경고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내 뜻을 거스르면 너까짓 거 정연주처럼 날려버리는 거 일도 아니다'라는 확실한 메시지인 셈입니다. 방송에 정권의 바지사장을 앉히는 건 공기업보다 훨씬 큰 파급효과를 미칩니다. 방송이 여론과 국민들의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이미 KBS는 강력한 구조조정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연주를 몰아낸 구실이 '방만경영'이었기 때문입니다. 희한한 건 KBS 노조가 정연주 사장에게 그렇게 날을 세웠던 이유가 팀제 개편을 위시한 구조조정이었다는 사실이죠. 이제 정권의 뜻에 따라서 정연주 때보다 몇 술은 더 뜰 구조조정의 칼날이 몰아치면 노조는 밥그릇 사수를 위해 한바탕 난리를 피우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른 혼란과 분열의 덤터기는 어차피 정연주 사장의 남은 임기를 채울 뿐인 유효기간 얼마 안 남은 바지사장이 쓰게 마련이고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들은 시치미를 뚝 떼게 마련입니다. 누가 KBS 바지사장을 조종할 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KBS의 공영성을 위해서' 며칠 전에 모였다던 그 분들, 그리고 그 분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한 분을 떠올려 보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물론 정권을 대신해서 덤터기를 써 줄 바지사장에게는 언제나 '보은 인사'라는 달콤한 댓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Posted by MP4/13

BLOG main image
Drive with your sense. by MP4/13
Add to Technorati Favorite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02)
광속질주 (205)
취생몽사 (160)
주지육림 (3)
독서삼매 (10)
음담패설 (28)
전광석화 (146)
우매상자 (66)
포장후면 (20)
악마사전 (6)
팔도유람 (20)
혹세무민 (508)
일상포착 (30)
Total : 3,916,095
Today : 584 Yesterday : 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