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가톨릭과 교황청이 한참 부패와 타락에 젖어 있을 때 '면죄부'란 게 있었다는 사실은 잘들 아실 겁니다. 원래 가톨릭 신자가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사제에게 고백성사를 통해서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지정하는 고행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는데, 면죄부를 사게 되면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죄를 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세 말기에 교황청에서 교회 건축이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면죄부를 점점 남발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 면죄부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과 가톨릭의 몰락을 불러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재벌들, 죄값을 투자와 거래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에게 아주 시원한 사면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늘 그렇듯이 경제 살리기, 일자리 창출, 국민화합, 국민통합, 이런 수식어들을 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이은 '유전사면 무전만기'라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공평을 확인시켜 주는 사면이 단행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면을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기업인들이 해외 활동에 불편을 겪고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점을 감안해서" 사면을 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이 말에 공감할 지 무척 궁금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전과가 있고 복권이 안 되면 여러 모로 불편을 겪게 마련입니다. 해외에 나가는 것도 그렇고, 취업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는 데에도 알게 모르게 발목을 잡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재벌 총수들이 전과 때문에 출국을 못 했다던가 회사 경영하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사실 그들이 사면을 받건 말건, 뭐가 그렇게 다른 것인지 사람들에게는 와 닿는 게 없습니다. 더구나, 전과 때문에 투자 심리가 위축된다는 말에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나비효과인가 싶기도 합니다. 전과가 있으면 투자를 안 하고, 사면을 받으면 투자를 한다? 과연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합니다. 20년 쯤 전에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던 말 만큼이나 정말 연결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재벌 총수들을 사면해 주면서 정부 여당은 이들에게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서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죄값을 투자나 일자리 창출과 거래한 셈입니다. 물론 정말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이 하해와 같은 은혜에 보답해서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설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연례 행사처럼 있어 왔던 비리 재벌 총수 사면 뒤에 투자나 고용이 갑자기 확 늘어났더라는 데이터도 없습니다.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재벌 총수 사면
이런 재벌 총수 사면은 이명박 정부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비롯해서 수구 보수 세력들이 집권했을 때 뿐만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에도 역시 에누리 없이 때만 되면 경제 살리기니 국민 통합을 구실로 재벌 총수들에게는 언제나 사면 혜택이 주어졌고, 이렇게 사면을 받은 총수들은 몇 년 지나면 또다시 비리를 저지르고, 또 사면을 받고, 이러다 보니 이제는 재벌들에게 어떤 단죄를 하든 "어차피 때 되면 사면해 줄 거 아냐?"라는 비웃음만 살 뿐입니다.
정말로 국민들을 통합하고 화합시키고 싶다면 오히려 '재벌들이라고 해서 법을 어겨서 무사하진 못하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제나 재벌들에게 면죄부를 안겨 주면 결국 사람들에게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이은 '유전사면 무전만기'이라는 냉소만을 쌓게 만들 테니까요. 언제나 기업인 단체에서는 '반기업정서' 때문에 기업을 못 해먹겠다고 얘기하지만 이런 일이 한 번 일어날 때마다 '반기업정서'가 곱절이 되게 마련입니다. 정말로 국민들의 반기업정서를 없애고 싶다면 때마다 죄지은 기업인들 사면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보다 그냥 '우리도 국민이니까 죄값은 똑같이 치르겠다'고 사면에서 빼 줄 것을 요청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결국 이번 사면으로 또다시 부자들과 서민들 사이에 골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임기 중에 벌어지는 비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그 말을 믿느니 차라리 허경영 씨가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반기문 씨한테 양보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언제나 다음에 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섭죠. 멀쩡하던 경제도 재벌 총수가 재판을 받고 처벌을 받으면 나이롱 환자마냥 갑자기 산소호흡기 끼고 누워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게 대한민국 경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재벌들에게 면죄부를 팔아라
어차피 결국에 재벌 총수들은 수백 수천 억을 횡령해도, 깡패들을 고용해서 사람을 패도 사면될 거라면 차라리 중세 가톨릭처럼 정부에서 면죄부를 파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당시 가톨릭에서 면죄부를 산 사람들에게는 고해성사와 그에 따르는 고행을 면제시켜 준 것처럼, 재벌 총수들에게 선불로 면죄부를 팔아서 그 면죄부를 산 재벌 총수들에게는 검찰 수사니 재판이니 하는 하나마나하는 쇼를 면제해 주는 것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요란 떨어 봤자 솜방망이 처벌로 국민들 한 번 열 받게 만들고, 사면으로 두 번 열 받게 만드느니 그냥 면죄부로 해결하면 한 번만 열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수사니 재판이니 해 봤자 결국 김앤장 같은 로펌만 떼돈 버는 거, 그럴 돈으로 차라리 면죄부를 사게 만들면 세금 깎아서 환심 사려는 이명박 정부의 모자라는 곳간도 채울 수 있어서 그야말로 형님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되겠죠. 어차피 비즈니스 후렌들뤼한 이명박 정부, 괜히 어설픈 쇼 하지 말고 그냥 노골적으로 면죄부 장사를 하시면 차라리 솔직하다는 소리라도 들을 겁니다.
어쩌면 한편에서는, "어차피 이 정권 5년 넘기기 힘든데 면죄부가 휴지조각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실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아무 걱정 안 하셔도 좋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노무현 정부에서도 언제나 재벌 총수들은 솜방방이 처벌과 사면 콤보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실 자신들이 집권할 때에도 재벌들에 대한 사면을 남발했던 민주당이 이번 사면을 비난하는 광경은 좀 낯두껍다 싶습니다). 어쨌거나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 집권하는 환타스틱한 상황이 닥쳐 온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안심하시고 면죄부를 사 두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면죄 받을 것, 단지 그 모양이 달라지는 것 뿐이기 때문에 면죄부 장사 한다고 해도 세상이 바뀔 건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유전면죄 무전유죄'로 바뀌는 정도겠죠.
다만, 너무 면죄부 장사에 열 올리다가 중세 가톨릭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빌미를 제공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근본이 뒤집히는 정치 개혁의 바람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까지 제가 책임질 수는 없으니 그 문제는 알아서 잘 하시기 바랍니다. 한 놈에 5만 포인트 씩 마일리지 적립해 주면서 경찰관 기동대로 때려잡든가 어쩌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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