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이명박 정부 정책 전반으로 퍼져 나가고 이제는 '정권퇴진'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광우병대책국민회의는 20일까지 재협상 선언을 하지 않으면 정권퇴진 투쟁으로 나가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마당입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두고 강력한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권퇴진 투쟁은 촛불의 순수성을 훼손한다느니, 선거로 뽑은 대통령에 대한 퇴진은 헌정질서나 선거민주주의의 중단을 낳는다느니, 하면서 정권퇴진 투쟁에 '출입금지' 팻말을 박으려는 움직임도 적지 않습니다.
관련 포스트 : 촛불의 성취 훼손할 정권퇴진투쟁론 (유창선닷컴)
도대체 헌정질서가 무엇이란 말인가
먼저 대통령 퇴진이 헌정질서 중단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헌정 질서가 대통령 임기 5년 사수에 있단 말입니까? 국민의 뜻을 더 이상 받들 능력도, 받들 생각도 없는 사람이 5년 동안 앉아서 5년 내내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게 만드는 것과, 그런 권력자가 자신의 능력 없음을 인정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과, 어느 쪽이 과연 헌정질서에 더 도움이 되는 걸까요? 답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서 형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형식과 본질이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과연 누가 이겨야 할까요? 형식일까요, 본질일까요? 이 역시도 답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형식은 본질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형식이 본질을 억압하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헌법에서 대통령의 중도 퇴진을 금지한 것도 아닙니다. 대통령이 임기가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사임을 할 수 있고 대통령이 사임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법률에 모두 규정이 되어 있습니다.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5년 임기가 아닙니다. 5년 동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5년 임기라고 해도 국민들의 뜻을 받들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국민들이 도저히 권력의 정점에 앉아 있는 꼴조차도 보기 싫은 권력자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진정한 헌정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관습헌법' 아니겠습니까? 국민들과 맞서고 국민들과 반대로 나가서 국민들을 억압하고 위협할 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되는 5년 임기라면 그건 봉건제 왕정제도에 5년 유효기간을 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이 뽑아 놓고 마음에 안 든다고 물러나라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인가요? 사람들은 이미 이명박 정부의 주요 정책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BBK 시비에 묻혀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명박 정부의 정책, 그러니까 한반도 대운하, 건강보험 민영화, 방송을 필두로 한 언론 장악 음모, 그리고 수도, 전기를 비롯한 필수 에너지조차도 사유화를 추진하는 정책들이 하나 하나 현실로 몸을 일으키면서, 평범한 사람들은 과연 '이 나라에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그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고 본다면 무척 안이한 상황 인식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이명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마음에 안 들어'가 아니라 '과연 내 삶이 제대로 될까' 하는 공포입니다.
물론 이러한 공포스러운 모습들을 미처 제대로 따져 보지 못하고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책임지고 이명박 마음대로 하게 방관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명박이 그런 정책들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싸우는 것일까요?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이 기어이 그런 정책을 추진하겠다면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 하는 게 속아서 이명박을 뽑은 국민들이 진정 책임지는 자세가 아닐까요? 육법전서 속 활자 위에 누워 있는 '헌정질서', '선거민주주의'가 이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그놈의 '순수'라는 유령
이슈가 쇠고기 문제에서 이명박 정부의 정책 전반, 더 나아가서 정권 퇴진 투쟁으로 번지는 것에 대해서 '순수' 타령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서 '순수'하게 시작했던 촛불집회가 정치투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게 그런 분들의 주장인데, 이런 물음부터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처음 촛불집회가 시작되었을 때 그걸 정녕 순수하게 보았습니까?"
이명박 정부는 애초부터 촛불집회를 불순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한승수 총리가 기세등등하게 불법행위 엄정대처와 같은 협박을 했고, 배후설은 그때부터 계속 제기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그 규모가 커지고 이슈가 확대되니까 얕은 꼼수로 처음의 촛불집회에 '순수'라는 햐안색 포장을 하는 것 뿐입니다. '순수'란 이름으로 '불순'을 공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얄팍한 이이제이 수법입니다.
비슷하게, 지금의 시민저항을 6.10에 비유하는 사람들에게 "어디 순수한 6.10 항쟁을 지금에 비교하냐"고 삿대질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께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과연 87년 당시에 6.10을 순수한 투쟁으로 봤습니까?" 지금 벌어지는 저항을 불순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87년 항쟁이라고 순수하게 보이겠습니까? 단지 지금의 저항을 공격하기 위해서 87년 항쟁에 '순수'란 너울을 씌우는 것 뿐입니다. 어떤 작은 범주에 '순수'란 딱지를 붙이면 그 바깥은 '불순'으로 낙인찍기 좋으니까요.
사실 '순수'란 말은 명확한 개념도 없고, 순수와 불순을 구별할 명확한 근거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유령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미국산 쇠고기 자체가 애초부터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국민의 건강주권을 팔아먹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성토가 벌어졌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그 자체가 아니라 국민 건강을 엿바꿔 먹은 정신 나간 정치 행위에 대한 성토였습니다. 이게 정치 투쟁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웰빙 투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명박 정부는 정신 차리라는 외침이었고, 아무리 외쳐도 정신을 못 차리니까 그렇게 정신 못 차릴 거면 때려 치라는 소리가 안 나오는 게 이상한 겁니다. 어차피, 정권과 국민이 맞서는 상황은 본질 자체가 정치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초보 수준에서 상당히 심화되고 구체화되었을 뿐입니다. 문제를 푸는 종착역은 결국 '정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실체 없는 '순수'란 유령이 마치 눈 앞에 있는 실체인 양 너무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순수'란 엿가락 같은 유령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도 불순으로 낙인찍힐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유령이 무서워서 도망다닐 겁니까?
싸움에서 금단의 영역이란 없다
저도 지금 상황에서 정권퇴진이란 상황으로 가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헌정질서니 선거민주주의니 하는 형식에 집착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그 이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싸울 때에 금단의 영역을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싸움에서 한계가 그어지면, 상대방은 편안해집니다. 상대방이 버티기만 하면 결국 싸움은 그 한계 안에서 멈추고 힘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재협상을 요구하는데 이명박 정권이 저렇게 버티기만 하면 어쩔 겁니까? 계속 재협상 요구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야 겠습니까?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압박 수위를 한 단계씩 높여 나가는 것은 싸움의 기본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우리가 국민들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정말로 정권을 내 놓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는 결코 국민들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지금까지도 배후설, 노무현 탓을 하면서 컨테이너로 국민과 소통을 단절해 버린 상황으로 이미 충분히 증명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압박은 좀 더 강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말로 정권퇴진을 시켜야겠다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카드'로서 정권퇴진 투쟁을 굳이 버려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싸울 때 카드는 많이 쥐고 있을 수록 좋습니다. 그것이 설령 '뻥카'일 지라도 말입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지리한 싸움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그 카드를 언제 뽑아야 할지, 과연 6월 20일에 그 카드를 뽑는 것이 적절한 시기인지, 이 점은 생각해 봐야겠지만요.
자꾸만 지금의 싸움에 뭔가 제한을 가하고 틀에 묶어 두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떤 프레임 안에 우리 자신을 가둘 때, 그때가 바로 싸움에서 패하는 때입니다. 이미 지금까지 온 상황만 해도 우리는 충분히 이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우리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서양의 잘난 나라들 같았으면 이 정도였다면 진작에 폭동이 나서 서울이 불바다가 되고도 남았을 겁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성적이고 잘 절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사실 저들이 아니라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실체 없는 두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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