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일이 있어서 간 인천공항에서 1층에 무대가 꾸며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인천공항과 함께 하는 문화공연>이란 타이틀로 두 달 동안 각종 공연이 벌어진다는데 때마침 공연 시간이 대충 맞았고 무대를 보니 재즈 콘서트인 듯했습니다. 시간도 좀 남았고 해서 어디 누가 나오나 보자,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얼마 전에 거금 11만 원을 지르고 봤던 소니 롤린스 콘서트의 여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눈 앞에서 보는 무대의 감동은 거장 만이 만들 수 있는 전유물은 아니죠.




그런데 테너 색소폰을 메고 무대에 오른 이는 바로 이정식 씨였습니다. 요즘이야 시절이 좋아서 버클리니 뭐니 본토 유학 갔다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재즈가 뭔지도 잘 몰랐던 시절에 재즈를 고집스럽게 지켜 온 사람들은 미군 무대나 이태원의 클럽에서 그야말로 '딴따라' 생활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다 고인이 되신 이봉조, 길옥윤 씨도 일본 재즈팬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색소폰 주자였죠. 그런 1세대와 본바닥 유학을 통해서 제대로 배운 젊은 뮤지션들 사이에 있는 낀 세대 뮤지션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대중들에게 이름도 많이 알려졌고, 실력 역시도 엄지 손가락 치켜 세워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1세대와 젊은 세대를 이어준 한국 재즈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이정식 씨를 이런 무대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한 시간이라는 짧은 무대였고, 공항 손님들을 위해서 마련한 무대였게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알려진 곡들로 레퍼토리를 꾸몄습니다. 미셸 르그랑이 작곡한 영화 <쉘부르의 우산> 주제곡으로 시작해서 척 맨지오네의 'Feels So Good', 그리고 'Danny Boy', 'House of Rising Sun'으로 이어졌습니다. 대체로 이정식 씨가 반주 없이 루바토(원래 악보에 지정된 음표의 길이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길이를 늘이고 줄이는 연주)로 자유롭게 연주를 시작했다가 테마로 들어간 뒤에 솔로가 돌고 다시 마무리에서는 이정식 씨의 독주로 마무리 하는 스타일로 연주가 이루어졌습니다.

중간 중간에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이 많은 걸 보고는 즉석에서 동요 몇 곡을 메들리로 색소폰으로 연주하고, 또 일본인 관객을 보고는 일본 가요를 연주하고,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는 모습도 보여 줬습니다. 공연장이라면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게 짜증났겠지만 이런 분위기야 뭐... 어쩌면 이게 재즈의 자유스러운 모습에 더 걸맞는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재즈는 너무 부담스럽고 럭셔리한 공연장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무료 공연이고 사람들이 잔뜩 모인 것도 아니지만 무대에 서면 언제나 정성을 보이는 이정식 씨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듯합니다. 10년 하고도 몇 년 전에 무주 재즈 페스티벌에서 일본의 트럼펫 주자 테루마사 히노와 격렬한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연주를 보여줬던 모습이 기억에 선합니다. 그 동안은 TV 같은 곳에서나 모습을 보았는데 이렇게 공연으로 본 건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콧수염도 기르고, 이제는 완연한 중년 신사 모습이 된 이정식 씨가 정말 반가웠습니다.

마지막 곡으로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을 라틴 풍으로 연주했습니다. 색소폰 독주로 마무리를 하는 듯 싶더니 선율이 '아리랑'으로 바뀌면서 느릿하게 '아리랑'으로 넘어갑니다. 마지막에 주자들을 소개하는데 피아노를 치는 여성 분이 이정식 씨의 딸이더군요. 지금 뉴욕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잠시 한국에 왔다가 같이 무대에 섰나 봅니다. 아버지와 딸이 함께 하는 무대, 이제 우리나라 재즈도 느릿하지만 조금씩 두텁게 역사가 쌓이는 듯합니다.




앵콜 곡으로는 '봄날은 간다'를 준비하셨더군요. 외국 공연을 갔다가 마무리를 하고 쫑파티를 하는 날, 고전무용을 하는 여성 분이 이 노래를 부르는데 고향 생각도 나고, 해서 다들 울음바다가 됐다나요. 어쩌면 공항에도 그렇게 고향 생각 나는 여행객들이 많을 듯합니다. 비록 외국 분들이 이 노래를 알 리야 없겠지만 색소폰을 타고 절절하게 흐르는 그 맺힘을 조금쯤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료로 본 게 좀 미안하다 싶을 정도 알찬 무대였습니다(물론 주최측으로부터 개런티는 넉넉하게 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음향을 잘 못 잡아서 그런지 베이스 솔로 때 음이 좀 뭉개지는 게 아쉬웠습니다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뜻하지 않은 1시간짜리 공짜 무대는 잠시 소니 롤린스 생각 같은 건 한 켠으로 밀쳐 놓아도 좋을 만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내일(6월 17일)도 이정식 씨 무대가 마련된니까 혹 인천공항에 들르시는 분들은 오후 4시부터 벌어지는 공연을 한 번쯤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7월까지 음악과 퍼포먼스 공연이 다양하게 펼쳐진다고 하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잠시나마 북적이는 공항에서 쉬어가는 느낌으로 무대를 찾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뱀발 : 사실 사진도 많이 찍고 동영상도 찍었지만 메모리카드가 날아가서 달랑 석 장 남았습니다. 어흑.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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