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에서는 포스 인디아와 함께 소규모 독립 팀이라 할 수 있는 수퍼 아구리 팀이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사실 수퍼 아구리 팀은 올해 초에도 자금 문제로 2008 시즌 출전이 불투명했습니다. 그 때문에 올해 내보낼 새로운 차량 모델도 공개하지 못했음은 물론 시즌 전 테스트에 거의 참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영국에 본거지를 둔 자동차 관련 투자 회사인 마그마 그룹이 아랍 에미레이트의 두바이 쪽 자본을 대표해서 이 팀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하고 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투입함으로써 수퍼 아구리 팀은 올 시즌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레인 그랑프리가 끝나고 나서 마그마 그룹이 인수 계획을 철회하고 더 이상 자금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시금 수퍼 아구리의 앞날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소규모 독립 팀이란?
'소규모 독립 팀(small independent team)'이란 말은 공식 용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FIA 회장인 맥스 모슬리도 이 용어를 자주 말해왔기 때문에 F1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소규모 독립 팀은 다음과 같은 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예산 규모가 정상급 팀보다 훨씬 적은 팀 : 정상급 팀인 페라리와 맥클라렌과 같은 팀들은 한 해 예산이 1억 달러를 훌쩍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소규모 독립 팀들은 이보다 몇 분의 1, 혹은 10분의 1 정도로 아주 적은 예산으로 운영됩니다. 10분의 1이라고 해도 1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100억 원 정도 하는 거액입니다만, F1 팀들이 물쓰듯이 쓰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비교한다면 아주 적은 액수입니다.
- 자동차 회사, 또는 거대 기업이 소유하거나 많은 지분을 갖고 있지 않은 팀 : F1에는 메르세데스-벤츠, 페라리(피아트 그룹), BMW, 르노, 혼다, 토요타를 비롯한 여러 자동차 회사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회사들은 페라리나 BMW 자우버처럼 자체 소유 팀(워크스 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고, 맥클라렌처럼 메르데세스-벤츠가 지분 40%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배경에 있는 자동차 회사나 거대 기업이 자금줄이 되는데 반해서, 소규모 독립 팀들은 보통 한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설립하는 경우가 많으며 스폰서십을 통해서 이익을 남기는 운영을 추구합니다. 또한 새시는 자체 제작하지만 엔진은 다른 자동차 회사나 전문 제작사에서 사서 씁니다. 이런 관점에서 레드 불, 토로 로소와 같은 팀들은 자동차 회사가 지분을 갖고 있지만 레드 불이라는 거대 기업이 가지고 있는 팀이므로 독립 팀으로 분류하기는 곤란합니다. 윌리엄스나 포스 인디아, 수퍼 아구리와 같은 팀들이 지금 F1에 있는 독립 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윌리엄스는 소규모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지금 F1에서 소규모 독립 팀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은 두 팀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F1에서 소규모 독립 팀이 필요한 이유는 있습니다. 신인 드라이버들이 정상급 팀에 바로 올라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팀마다 레이스에 참여할 수 있는 드라이버는 두 명 뿐이고, 정상급 팀은 우승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럴 만한 검증된 드라이버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합니다. 따라서 재능은 있지만 검증 받지 못한 신인들은 소규모 독립 팀에서 시작해서 실력을 인정 받으면서 단계를 밟아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현 월드 챔피언인 키미 라이코넨도 당시에는 중규모 독립 팀이었던 자우버가 발탁해서 F1에 데뷔했고 뒤이어서 맥클라렌과 페라리를 거쳤습니다. 2005-2006 더블 월드 챔피언 페르난도 알론소 역시 소규모 독립 팀인 미날디 팀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F1은 엔지니어, 미케닉, 설계자를 비롯한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지만 역시 정상급 팀들은 실력이 뛰어나고 경험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소규모 독립 팀을 통해 F1에 발을 들여놓고 실력을 발휘해서 큰 팀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듯 소규모 독립 팀들은 F1에 영양을 공급하는 원천으로서 그 의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좀 키워 놓으면 톱 클래스 팀들에게 인재들을 빼앗기기 때문에 속은 쓰리겠지만...
FIA의 자충수, 독립 팀을 말라 죽이다
사실 F1에서 이렇게 자동차 회사들이 직접 전투에 뛰어든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워크스 팀이라 할 수 있는 팀은 페라리 뿐이었고 메르데세스-벤츠가 지분을 가진 맥클라렌 정도가 자동차 회사가 관계된 팀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엔진 공급을 통해 참여한 자동차 회사도 레이싱 엔진 전문 제작 회사인 코스워스를 소유하고 있었던 포드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상황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럽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BMW가 윌리엄스를 통해서 F1에 뛰어들고, 토요타는 아예 새로운 워크스 팀을 만들었습니다. 포드는 아예 스튜어트 팀을 사들여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규어 브랜드를 내걸고 워크스 팀을 만들었습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맥클라렌에 엔진을 공급하면서 F1을 호령했던 혼다도 BAR를 통해서 다시 엔진을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이러던 상황이 흔들거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입니다. 한 때 맥클라렌의 수석 기술 감독인 애드리언 뉴이를 거의 끌어들일 뻔할 정도로 상당한 투자를 했던 포드였지만,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고 중위권에 머물자 결국 포드는 재규어 팀을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엔진 제작사 코스워스까지 팔아버리고 F1에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결국 재규어 팀은 오스트리아의 에너지 드링크 회사인 레드 불에 매각됩니다. 이 일을 기점으로 FIA 회장 맥스 모슬리는 지금 정상급 팀들이 쓰는 예산의 10분의 1만으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하겠다면서 온갖 규정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잦은 규정 변경이 오히려 소규모 독립 팀들에게는 치명적인 비수를 꽂은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규정을 변경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설계부터 제작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 하고, 한 곳이 변경되면 다른 여러 곳에서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예산이 부족한 소규모 독립 팀들은 이런 규정 변경에 따른 개발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결국 경쟁에서 더더욱 뒤처지고, 경쟁에서 밀려날 수록 스폰서십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자금줄이 더더욱 말라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2004년 5월에 맥스 모슬리는 그때까지 콩코드 협정을 통해서 쓰고 있던 3.0 리터 V10 엔진을 2006년부터 2.4 리터 V8 엔진으로 변경하자는 안을 들고 나왔습니다. 많은 팀들이 반대했고, 결국 F1의 상업권을 보유하고 있는 버니 에클레스톤과 팀들은 엔진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대신에 회전수 제한 장치를 두고 타이어를 단일 공급사 체계로 전환하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맥스와 페라리는 이를 무시하고 2.4 리터 엔진을 관철시켰습니다. 지금의 F1이 너무 빠르니 안전을 위해서 엔진 제원을 떨어뜨리자는 이유였습니다. 그 결과는? 엔진 제원이 떨어져도 별로 느려진 것도 없고 오히려 코너링에서는 더 빨라졌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맥스는 2.4 리터 엔진에 회전수 제한 장치와 단일 공급사 타이어 체계를 덧붙였습니다. 결국 2.4 리터 엔진을 개발하기 위해서, 또한 2.4 리터 엔진에 맞는 새시를 새로 개발하기 위해서 팀과 엔진 제작사는 막대한 돈만 낭비한 꼴이 되었습니다.
규정이 변경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성능을 올리기 위한 개선 작업은 계속되고 많은 돈을 투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것을 개선하는 것과, 처음부터 다시 개발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맥스 모슬리의 생각대로, 예산 절감을 위해서 규정을 자주 변경함으로써 길게 보면 적은 예산으로도 경쟁력 있는 차량을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장 다음 시즌에 참여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지도 불안한 소규모 독립 팀들은 그런 장기 전망을 기대할 만큼 넉넉치 않습니다. 결국 '소규모 독립 팀들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던 맥스의 계획들은 거꾸로 소규모 독립 팀들을 말라 죽이는 원인이 된 셈입니다.
결국 애로우즈 팀은 무너졌고, 조던은 미드랜드→스파이커→포스 인디아로 이리저리 소유주가 바뀌었습니다. 페라리 다음으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했던 엔진 제작사인 코스워스 역시도 엔진 개발 동결이 시발점이 되어 F1에서 퇴출되었습니다. 오히려 자동차 회사, 아니면 돈 많은 레드 불 같은 기업이 손에 쥐고 있는 회사가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FIA는 고육지책으로, 2008년부터는 소규모 팀들이 다른 회사의 새시를 사서 쓰는, 이른바 커스토머 카로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이 역시도 F1을 움직이고 있는 중심인 콩코드 협정에서 밝힌 대로, 자기 팀의 새시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컨스트럭터로서 F1에 참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문제가 되어서 결국은 올해부터 참가가 예정되었던 프로드라이브 팀이 참가를 철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규모 독립 팀에게는 여전히 암울한 앞날
냉정하게 말하자면 지금 F1이 굴러가는 상황을 보면 소규모 독립 팀들에게는 암울한 앞날입니다. 아니, 규모에 관계없이 독립 팀들에게는 험난한 앞날이 될 것입니다. 독립 팀 가운데 레드 불은 거대 기업이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상황이니 예외로 한다면, 그나마 경쟁력이 있는 독립 팀은 윌리엄스 정도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에너지 회복 시스템, 공기역학 장치에 관한 규정 대폭 변경을 비롯해서 큰 폭의 규정 변경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별달리 광고를 할 곳이 없는 담배 회사들이 소규모 팀들에게도 자금줄이 되었지만 이제는 하위 팀들은 변변한 스폰서를 잡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그야말로 돈이 썩어 남아 돌아가는 억만장자가 아니고서는 F1을 운영하는 게 거의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FIA가 내놓은 이런저런 수가 결국 소규모 팀들의 목을 졸라버린 결과가 되어 버린 마당에, FIA에서는 결국에는 예산 자체를 제한하겠다는 카드까지 들고 나왔습니다. 곧, 팀이 1년 동안 쓸 수 있는 전체 예산을 제한함으로써 예산 격차를 줄이겠다는 것인데, 과연 사기업의 투자나 예산을 제한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의문이지만, 회사 내부에서 일어나는 돈의 흐름을 어떻게 FIA가 통제할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예산 규모를 속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된다면 F1 팀들은 분식회계와 비자금 만드는 계통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재벌들에게 많이 배워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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