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차례 선거에서 그동안은 투표를 하기만 했습니다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투표 참관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제가 밀었던 정당의 참관인 자격으로 마포 을 선거구의 한 투표소에서 12시부터 6시까지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루할 수밖에 없죠. TV나 라디오를 틀어주는 것도 아니고, 투표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좀 보다보면 그 모습이 그 모습이다보니 심심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투표를 하러 잠깐 들렀던 투표소에서 오후 내내 있다보니까 투표라는 과정이 달라보이기도 했고, 또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도 있었습니다.
투표 시간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만, 참관인은 보통 오전 6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정오부터 오후 6시까지, 이렇게 오전조와 오후조 6시간 참관을 기준으로 합니다. 지역구에 후보자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비례대표 투표가 있기 때문에 비례대표 등록을 한 정당은 지역구 출마에 관계없이 참관인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제 경우는 지역구에도 후보자가 나왔으니 별 관계는 없지만요.
12:30
지정된 투표소에 도착하니까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오전부터 나와 있던 분들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왔습니다. 참관인들에게는 끼니와 함께 2만 5천 원이 현장에서 지급됩니다. 일하는 사무원들은 물론이고 투표 안내 도우미 일을 하는 학생들에게도 수당이 지급됩니다. 수당이 있다지만 알바거리로 할 만한 액수는 아니죠.
투표함 옆 지정된 참관석에 앉아서 투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제가 할 일입니다. 뭔가 이상한 상황, 특히 투표 부정이 의심되는 경우에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다행히 특별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좀 썰렁한 느낌이었습니다. 예전 총선 때만 해도 그래도 본인 확인하는 창구 앞에 몇 명 정도는 기다리는 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투표소에 도착하면 바로바로 투표를 하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기표소 세 곳이 다 차는 경우도 별로 없었습니다.
지난 총선 때부터 비례대표 제도가 시행되어서 지역구 후보자에게 한 표, 비례대표 정당에 한 표, 이렇게 두 표를 찍게 되었는데 아직도 이 부분을 헷갈리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나이 드신 분들이 특히 많이 그랬지만 젊은 분들 중에서도 가끔 두 표 모두에 하나씩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도 있었고, 지역구와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따로따로 별도 투표함에 넣어야 한다는 점을 모르고 한꺼번에 접어서 한 투표함에 넣으려다가 사무원에게 제지를 받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습니다. 물론 아무리 홍보를 하고 안내를 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한귀로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투표소 입구나 기표소 앞에서, 또는 투표 용지를 나눠줄 때 한 번쯤 더 안내를 해 주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또한 표를 찍은 다음에 누굴 찍었는지 남들이 훤히 보이도록 투표함에 넣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용지를 한두 번 정도 접어주는 게 원칙입니다만 팔랑팔랑한 용지를 그대로 들고 나와서 투표함에 넣는 분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용지를 접었다고 해도 찍은 위치에 따라서 어디에 투표했는지 보이게 되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이 경우는 용지가 뒤가 비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떳떳하게 한 자기 선택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습니까마는, 비밀투표가 원칙이기 때문에 용지 재질을 바꾸던가, 기표를 하는 부분 뒤쪽에 검은 칠을 하던가 하는 방법으로 비밀을 유지해 주는 방안도 필요할 듯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투표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기도 합니다. 표를 찍은 다음에 아이들에게 투표함에 넣어 보라고 용지를 쥐어 주는 부모님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가끔은 기표소에 들어가서 장난을 치거나, 심지어는 인라인 스케이트까지 타고 와서 투표소를 휘젓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만, 가족들이 함께 투표하는 모습은 흐뭇해 보이더군요.
때로는 투표소를 잘 못 찾아와서 발길을 돌리는 분들도 있었고, 신분증을 깜빡 놓고 와서 돌아가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최근에 이사를 온 분들 중에서는 그냥 주소지 근처 투표소에 오면 되는 줄 알고 왔다가 돌아가는 분들도 있었는데, 3월 28일을 기준으로 그 이후에 전입한 분들은 예전 거주지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리는 분도 있었습니다. 예전 주소지가 경남 창원이니 이제 와서 투표하러 창원으로 갈 수도 없고...
올해 선거부터는 투표를 마친 사람들에게 확인증을 나눠 줍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공영주차장과 같은 공공 시설을 이용할 때 요금 면제나 할인 혜택을 주는데, 어떤 분들은 무시하고 그냥 가 버리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몇 장 더 달라고 조르기도 합니다. 한 사람에 한 장이 원칙입니다만, 가끔 부모를 따라온 아이들이 떼를 쓰거나 하면 한 장 정도는 더 주기도 하더군요. 하지만 투표를 유인할 매력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던 듯합니다. 사무원들조차도 "이거 쓰는 사람 얼마나 있겠어?" 하고 심드렁한 반응이었습니다. 참고로 투표 확인증은 오늘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4월 30일까지 쓸 수 있습니다.
15:00
오후 3시가 지났지만 투표율은 영 좋지가 않았습니다. 사무원들이 "30% 좀 넘었는데... 이래가지고 40%라도 되겠어?" 이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경험이 많은 분들의 예상은 잘해봐야 40%가 좀 넘을 것 같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게다가 오후부터는 비까지 내리다보니까 투표율은 더 안 오를 것 같다는 걱정이었습니다. 사무원 몇 분의 표정이 조금 초조해 보였습니다. 여전히 투표소의 표정은 한산했고, 정말 이러다가는 40%도 넘기 힘들 것 같아 보였습니다.
17:30
그래도 투표 마감 시각을 30분 정도 남겨 놓고서부터는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서 투표소가 바빠졌습니다. 일찍 오던 늦게 오던, 어쨌거나 투표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보통 젊은 층들은 투표를 안 하고 놀러나 간다고 생각합니다만, 투표소에서 지켜본 바로는 오후에는 젊은 분들 비율이 더 높았던 듯합니다. 물론 나이드신 분들은 오히려 일찌감치 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요.
"41%!" 투표 마감 시각 20분 정도를 남겨 놓고 투표율을 집계하던 사무원이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모두들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와, 그래도 40%은 넘었구나..." 사실 예전 같았으면 정말로 형편없었을 투표율이지만, 이번에는 40%을 넘은 것조차도 다행이라는 분위기입니다. 정말 이번 선거 투표율이 50%에서 간당간당할 거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마감을 앞두고 사람들이 좀 많아졌지만 그래도 42-43%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네요. 아까 40%을 조금 넘을 거라던 사무원 분의 예상이 적중한 셈입니다. 그나마도 마감 시간이 10분 정도 남으니까 투표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기고 드문드문 한두 분씩 나타나는, 그야말로 파장 분위기가 됐습니다.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차도 별로 없는 톨게이트에 직원이 많다고 호통을 쳤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마 이런 투표율이라면 앞으로 투표소에 배치되는 사람들도 줄이라고 호통을 치지 않을까요?
18:00
오후 6시가 됐습니다. 하지만 참관인들은 그걸로 끝은 아닙니다. 투표함을 봉인하고 개표소까지 가지고 가는 과정도 지켜 봐야 합니다. 경찰관이 입회한 자리에서 사무원들이 투표함을 봉인하고 기표소를 비롯한 시설들을 철거하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에 꺼두었던 TV를 켜고 출구조사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투표함이 투표 사무원과 경찰관, 그리고 참관인 대표 한 명과 함께 서울역 근처에 있는 개표소로 출발하는 과정까지 보고 나서야 일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괴이했던 18대 국회의원 선거도 막을 내렸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쟁점도 없었고, 친박연대라는 엽기적인 정당까지 등장하면서 공천부터 선거운동까지 국민들에게 참 밥맛 떨어지게 만들었던 선거였지만 그렇다고 그 선거의 유효기간이 짧아지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뽑았던 뽑지 않았던, 당선된 국회의원들과 4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 4년에 대한 책임은 국민 모두가 함께 지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단순히 표 찍어 주는 유권자에서 벗어나서 제가 지지하는 후보의 선거운동에도 참여했고, 투표 참관인으로 투표소도 지켜 보았습니다. 조금은 지루한 오후 시간이었고 다른 분들한테도 한 번 해 보시라고 권할 만큼 재미난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투표소의 모습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선거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한 번쯤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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