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일부 바뀐 포뮬러 1의 예선 규정이 다시 조금 바뀔 듯합니다. 지난 말레이시아 그랑프리에서 일부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규정이 조금 바뀔 듯합니다.
모터 레이스에서는 결승전 출발 때 모든 차량들이 한 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출발선 뒤에 지그재그로 길게 늘어서게 되는데, 이렇게 늘어서는 순서를 결정하는 것이 예선입니다. 당연히 이 자리가 앞에 있을 수록 출발 때 유리하고 가장 앞 자리를 '폴 포지션(pole position)'이라고 합니다. 곧, 예선 성적이 가장 좋은 드라이버가 폴 포지션을 차지하게 됩니다.
현재 F1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예선을 치릅니다.
- 예선은 1차 예선 15분, 2차 예선 15분, 그리고 3차 예선 10분으로 나뉩니다.
- 예선은 한 바퀴를 빨리 돈 최고 기록 순서대로 순위를 결정합니다. 한 드라이버가 예선 도중에 몇 바퀴를 돌았는지에 관계 없이, 가장 빨리 돈 바퀴의 기록으로 순위를 매깁니다.
- 1차 예선이 끝나면 전체 22대 가운데 가장 기록이 나쁜 드라이버 여섯 명을 탈락시킵니다. 이 여섯 명은 기록 순위대로 레이스 출발 때 17-22위 자리에 서게 됩니다. 나머지 16명은 2차 예선으로 올라갑니다.
- 2차 예선이 끝나면 다시 가장 기록이 나쁜 드라이버 여섯 명을 탈락시킵니다. 이 여섯 명은 기록 순위대로 레이스 출발 때 11-16위 자리에 서게 됩니다. 나머지 10명은 3차 예선으로 올라갑니다.
- 3차 예선을 시작할 때, 차량들은 3차 예선은 물론이고 레이스 출발 때부터 첫번째 피트 스탑 때까지 쓸 연료를 넣습니다. 곧, 3차 예선이 시작하면 레이스에서 첫 피트 스탑을 할 때까지 연료 주입이 금지됩니다.
- 3차 예선이 끝나면 1, 2차 예선과 마찬가지로 한 바퀴를 돈 최고 기록 순서대로 레이스 출발 때 1-10위 자리에 서게 됩니다.
- 만약 1, 2차 예선 때 사고나 고장과 같은 이유로 차량이 자기 힘으로 피트의 자리 개러지까지 돌아오지 못했다면 기록에 관계 없이 다음 예선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됩니다.
플라잉 랩을 마치고 결승선을 통과한 차량은 바로 피트에 들어갈 수 없고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합니다. 피트로 들어가는 입구가 결승선에 닿기 전에 있고, 그렇다고 트랙에서 역주행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급가속과 급브레이크를 되풀이하면서 빠르게 달릴 경우와 느릿느릿하게 정속 주행을 할 때 소비되는 연료량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2.4 리터 배기량 8기통 엔진으로 750 마력이 넘는 어마어마한 출력을 뽑아내는 F1 엔진이다보니 연비는 극악입니다. 게다가 워낙에 커브가 급하고 많은 트랙을 빠르게 돌아야 하니 급가속과 급제동을 계속 되풀이 합니다. 잘 상상이 안 되시는 분들을 위해서 비교를 하자면, 지금 영동고속도로 대관령-강릉 구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꼬불꼬불했던 제한속도 40km/h의 구 대관령-강릉 구간을 100km/h가 넘는 속력으로 달린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실 F1 머신이 대단한 것은 350km/h를 넘나드는 최고 속력이 아니라 꼬불꼬불한 커브를 100km/h가 넘는 속력으로 돌 수 있는 기술력입니다. 아무튼 이런 F1 머신인지라 레이스 때 연비는 보통 1리터에 1km/h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레이스나 플라잉 랩 처럼 급가속과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느리게 달리면서 일정한 속력을 유지하면 연비가 훨씬 좋아집니다. 따라서 한 바퀴 만으로도 몇 리터를 아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잉 랩을 마친 드라이버는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피트로 들어가는 한 바퀴를 느릿느릿하게 정속으로 도는데, 문제는 어떤 차량은 그렇게 느리게 도는 와중에도 다른 차량은 열나게 플라잉 랩을 돌기 위해서 전력 질주를 한다는 겁니다. 같은 도로에서, 어떤 차량은 100km/h로 달리고 있는데, 어떤 차량은 300km/h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아주 높아집니다. 30km/h와 100km/h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 상황입니다.
지난 말레이시아 그랑프리 예선 때 이런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는데, 플라잉 랩을 돌고 있던 닉 하이드펠트(트랙 가운데 흰색 차량)와 페르난도 알론소 (위쪽 사진 제일 뒤에 보이는 노란색 차량) 앞에 플라잉 랩을 앞서 마치고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기어간다지만 시속 80km/h에서 100km/h은 됩니다) 차량들이 여럿 나타난 겁니다. 게다가 루이스 해밀튼과 헤이키 코발라이넨의 차량들은 하필이면 빠르게 코너를 돌기 위해서는 꼭 타야 하는 레이싱 라인에 걸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이 차량들을 피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이 생겼습니다. 상황도 위험했고, 당연히 하이드펠트와 알론소는 이 차량들을 피하는 만큼 시간을 까먹어서 손해를 봤습니다. 결국 해밀튼과 코발라이넨은 다른 드라이버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출발 때 순서가 5 단계씩 밀리는 벌칙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여러 드라이버와 팀 관계자들이 예선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FIA는 결국 3차 예선에 대한 규정을 일부 바꿀 예정이라고 합니다.
FIA가 구상하는 해결 방안은 플라잉 랩을 마치고 피트에 들어가는 차량에게 제한 시간을 두는 것입니다. 곧, 3차 예선 때에 플라잉 랩을 마친 차량이 제한 시간 안에 피트에 들어오지 않으면 벌칙을 부과하는 것입니다. 이 제한 시간은 통상 차량들이 한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의 120% 정도 선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입니다. 곧, 어떤 서킷에서 차량들이 보통 한 바퀴를 도는 데 1분 40초, 곧 100초가 걸린다면 플라잉 랩을 마친 뒤에 피트로 돌아오는 제한 시간은 100×1.2=120초, 곧 2분이 되는 셈입니다. 이렇게 하면 차량들이 연료를 아끼기 위해서 너무 느리게 달려서 플라잉 랩을 도는 차량의 앞을 가로막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규정은 해가 갈 수록 자꾸 두꺼워지고, 점점 조항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어떤 규정이 생기면 실제 운용 과정에서 맹점이 생기고 그 맹점을 보완하는 규정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1950년에 F1 월드 챔피언십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규정은 "엔진은 과급은 1.5 리터, 과급이 아니면 4.5 리터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게 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2008년도 F1 규정은 기술 규정만 해도 60 페이지나 됩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맹점을 보완하기 위한 규정들이 해가 갈 수록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규정의 바다 속에서도 어딘가 비어 있을 맹점을 찾아서 이익을 챙기기 위한 팀과 드라이버들의 잔머리도 계속 되겠죠. 페라리 팀이 규정의 맹점을 찾아내고 이용하기 위해서 쓰는 비용이 거의 10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꼭 F1 만이 아니죠. 세상사라는 게 언제나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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