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고밀도 광매체 전쟁에서 결국 소니 진영의 블루레이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HD-DVD 진영을 이끌던 도시바가 사업 철수를 선언하면서 그동안 서서히 기울어왔던 두 진영 사이 전투는급속하게 블루레이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왜 HD-DVD가 패배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이미 전문가들이 저장용량이나 복제방지와 같은 기술 차이, 그리고 시장공략이라는 면에서 여러 가지 해답을 내놓았습니다만,저는 HD-DVD가 패배한 원인을 하나 더 꼽고자 합니다. 바로 '이름'입니다. 이미 이름에서 HD-DVD는 지고 들어갔습니다.
'블루레이'란 이름은 이미 이름에서부터 DVD와는 다른, 뭔가 획기적인 개발이 이루어진 듯한 이미지를 심어줍니다. 하지만 'HD-DVD', 그러니까 해석하면 '고밀도(High Density) DVD'는 획기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DVD를 개량한 듯한 이미지를 줍니다. 결국 소비자들의 심리 속에서는 두 가지 이름을 들었을 때, 블루레이 쪽이 더 혁신적이고 아예 새로운 포맷인 느낌을 줍니다. 곧, '블루레이가 더 진보된 기술이므로 더 좋을 것이다'라는 이미지를 은근하게 심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차별화 전략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마케팅계의 고전인 <포지셔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 책에서 경고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라인 확장의 유혹'입니다. 곧, 이미 잘 나가고 있는 이름에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여서 기존 인기에 무임승차하고자 하는 유혹을 뜻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처음에는 이미 인지도를 갖춘 기존 브랜드 덕분에 사람들에게 잘 기억될지 모르지만 결국 '차별성'에서 커다란 약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HD-DVD 역시도 '라인 확장의 유혹'에 빠진 셈입니다. 곧, DVD라는 이미 널리 퍼진 매체의 인지도를 등에 업고, 'HD-'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초기 인지도를 노렸지만, 결국은 이름이 갖는 이미지에서 DVD와 차별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좀 나아진 DVD일 뿐이지, 혁신적인 새 매체는 아니라는 이미지가 무의식중에 생긴 것이지요. 물론 HD-DVD는 그 태생 자체가 DVD의 연장선 위에 있고, 이미 있는 DVD 포맷을 활용함으로써 매체 제작 단가나 플레이어 제작 단가를 낮춘 전략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름을 HD-DVD로 한 것은 네이밍에서 큰 실책입니다. 설령 그 기술 배경에 DVD가 있었다고 해도, DVD란 이름을 빼고 다른 새로운 이름을 붙였어야 합니다.
사실 일반 소비자들은 블루레이와 HD-DVD 사이에 기술적인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모릅니다. 사양에 관한 문서를 본다고 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죠. 물론 HD-DVD가 '좀 더 싼 가격'이라는 메리트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HD-DVD 역시도 싸지는 않고 타이틀도 부족한, 지금 상황으로서는 '사치품'에 속하기 때문에, 또한 시간이 지나면 급격하게 가격이 떨어지는 전자제품의 특성을 소비자들도 그동안 여러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국 초기 시장에서는 두 포맷 사이 가격 차이를 크게 고민하지 않을 넉넉한 사람들, 특히 얼리 어댑터들이 주요 고객이 되는 셈이고, 이럴 때에는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기술은 물론 이미지입니다. 곧, 어차피 비싼 돈 주고 사는 것이니 좀더 좋은 품질, 획기적인 발전, 이런 이미지들이 구매 결정에 중요한 노릇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DVD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개량품'이라는 이미지를 주는 HD-DVD는이미 블루레이와 이름 싸움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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