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에게 변신이 필요한가? 최근에 블로고스피어에서 유재석에 대해서 '변화가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변화가 없다는 말로 따지자면 정말 변화가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임성훈, 허참, 송해... 이런 분들은 그야말로 몇십 년째 변화 없는 똑같은 진행 방식으로 방송하는 분들입니다. 허참 씨나 송해 씨는 특정 프로그램에만 얽매여 있으니 유재석과는 좀 다른 문제 아닌가 치고, 임성훈 씨는 여러 인기 프로그램들을 섭렵했습니다만 그러다고 폭넓은 변신을 보여주는 캐릭터는 더더욱 아닙니다. 하지만 임성훈 씨는 몇 십년을 인기 MC로 군림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MC에게 필요한 것은 변신이 아니라 본능처럼 몸에 배여 있는 고도화된 캐릭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메인 MC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연기자에게는 폭넓은 연기폭, 연기 변신과 같은 말은 꽤 매력 있는 타이틀입니다. 하지만 연기자가 그렇게 캐릭터 변신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연기자는 미리 짜 놓은 대본을 가지고 연기를 합니다. 곧, 연습으로 낯선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갖게 됩니다. 또한 조연들은 주연의 캐릭터를 돋보이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MC는 대본대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에도 여러 작가들이 있고 대본을 쓰지만, 대체로 잘 하는 MC들은 대본을 외우지 않습니다. 구성과 진행 흐름이 어떻게 되는지만을 대략 보는 거죠. 대사는 오프닝 멘트나 마지막 정리 멘트 정도를 기억해 두는 수준이고 나머지는 거의 애드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의 대본은 대사가 많지 않고 그 대사의 비중도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본에 있는 대사 그대로 외워서 멘트하는 MC는 '감없다'는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대본대로 하라'는 게 아니라 힌트를 주는 거죠. 따라서 본능적으로 상황에 맞게 멘트를 던져야 하는데, 이런 건 연습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의 성격, 스타일과 맞아 떨어져야 하며, 그게 숨쉬듯 본능으로 녹아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집단 MC 체제로 가는 경우에는 머릿 속에서 굴리고 생각해서 멘트를 할 여유가 없습니다. 절대 다른 MC들이 생각할 틈을 안 줍니다. 그야말로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경쟁하는 틈바구니에서는 그냥 순간적으로 멘트가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요즘 개그맨들이 예능 프로에서 제 구실을 못하는 이유도, 짜여진 대본대로 외우는 개그에 익숙해진 개그맨들은 그때그때 순발력 있게 본능적으로 던지는 멘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개그맨에게는 '웃기는'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그걸 의식하고 머릿 속에서 '웃기는 멘트'를 생각하고 굴리는 시간에 자기가 멘트를 할 타이밍은 다른 출연자들이 다 나꿔채 버립니다. 게다가 서브 MC나 패널들은 메인 MC를 도와 주지 않습니다. 서로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조금이라도 더 튀려고 경쟁하게 마련입니다. 메인 MC는 도움 없이 알아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다른 출연진들 말 적당히 끊고, 정리하고, 핀잔 주고, 싸움 붙이고, 하는 건 순전히 메인 MC 능력입니다.

영화는 배우를 데려다 놓고서, 대본을 주고, "자, 이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소화해 봐"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MC의 캐릭터를 염두에 두고 구성을 짭니다.  따라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대하는 것은 변신의 폭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구성 안에서 어떤 캐릭터가 필요할 때 그 부분을 확실하게 해 줄 수 있는 고도화된 인물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강호동 같은 경우에는 소란스럽게 '팍팍!' 질러대는 멘트, 좀 무식해보인다 싶을 정도로 드라이하고 힘있게 발산하는 캐릭터로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트렌드에 안맞고 유재석 같은 스타일이 대세라고 해서 강호동이 유재석과 같은 캐릭터로 변신하려고 한다면 성공할까요? 100% 실패입니다. 강호동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미 고도화될 대로 고도화된 유재석이 있는데 왜 강호동을 씁니까?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이 그런 모험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유재석이 요즘은 무 팍도사와 같은 스타일이 대세라고 해서 강호동처럼 파워풀하게 내지르는 스타일로 변신한다? 마찬가지입니다. 100% 실패입니다. 강호동이라는 확실한 캐릭터가 있는데 왜 유재석을 씁니까?

유재석이 '변화가 없는' 캐릭터인데도 불구하고 오래 가는 이유는, 임성훈 씨처럼 매끄러운 캐릭터를 고도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대부분은 MC가 1인, 많아야 2인 체제였고, 따라서 메인 MC가 프로그램을 쥐어틀고 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단 MC 체제가 많아졌고, 각 MC, 또는 패널들이 확실한 자기 개성을 가지고 서로 부딪치고 경쟁하는 구도로 가는 편입니다. 하지만, 모든 개성 있는 캐릭터를 가진 MC들이 개성을 내세우기만 하는 식이 되면 프로그램이 많이 팍팍해집니다. 그리고 공중파로서는 너무 프로그램이 독해진다는 문제도 생깁니다. 이럴 때는 윤활유처럼 매끄럽게 여러 개성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거친 개성들을 완화시킬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하고 그 지점을 가장 잘 공략한 인물이 유재석 씨라는 겁니다. 1인 MC 시대에 확실한 1인자였던 임성훈 씨가 매끄럽고 지적인 인상과 멘트를 통해서 트렌드를 주도해 나갔듯이, 유재석은 역시 매끄러우면서도 거칠어 보이지 않는, 어떤 면에서 보는 지적인 인상까지도 풍기는 캐릭터를 통해서 거친 개성을 가진 다른 출연진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완충 작용을 함으로써 자칫 개성들이 서로 부딪쳐서 팍팍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구조를 유연하게 만드는 일을 해 왔습니다. 게다가 예능 프로그램의 트렌드가 변하고 스타일이 다양해진다고 해도, 어쨌든 여러 개성 있는 출연자들 사이에서 적절한 완충 작용을 해 주는 메인 MC는 어지간한 프로그램들에서는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임성훈 씨나 유재석 둘 다, 큰 흐름에서 가장 활용 폭이 넓은 캐릭터를 확실하게 고도화시켰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습니다. 유재석만이 아니라 긴 기간에 걸쳐서 인기를 유지하는 MC들을 보면 다들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진 캐릭터를 고도화시키고 본능으로 녹아들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재석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습니다. 트렌드가 변한다고 해도, 어차피 거칠고 독한 쪽으로 가게 마련이지, 예쁘고 착한 옛날로 돌아가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개성있고 거칠고, 독특한 사람들이 TV를 점령할 것이고, 그 사이에서 완충 작용을 매끄럽게 잘 해줄 사람은 유재석 씨 말고는 아직까지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어떤 프로그램에서 완충 작용을 할 사람은 어차피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을 놓고 유재석이라는 확실하게 보증된 카드가 아닌, 다른 모험을 굳이 하려고 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트렌드가 많이 바뀌어서 더 이상 유재석이 가진 트렌드가 매력이 없다면 결국 방송에서 섭외 전화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겁니다. 그건 MC가 안고 가야 하는 숙명입니다. 거기서 무슨 변신이니 뭐니, 해봤자 써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재석이 김구라처럼 독설을 한다면? 신정환처럼 4차원성 멘트를 툭툭 던진다면? 이미 고도화된 캐릭터까지 무너뜨리는 바보짓이고, 시청자들은 그런 유재석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성공하는 MC의 조건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얼마나 잘 팔리는 캐릭터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자신이 잡은 캐릭터를 얼마나 고도화시켜서 제작진이 어떤 프로그램 구성에서 '이런 캐릭터가 필요한데...' 할 때, 자기가 바로 떠오를 수 있을 정도로까지 만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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