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에, 여권을 만들러 갔습니다. 예전에 여권을 만들었지만 쓸 일이 없다보니 먼지만 쌓이다가 한참 전에 유효기간이 지났는데, 이번에 나라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여권을 만들러 갔습니다. 예전에는 아침 일찍부터 기다려야 겨우 신청 수 있었다는데 요즘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30분 가까이 기다렸으니까 짧다고 할 수는 없죠. 하여간에, 신청서를 들이미니 담당자가 서류 복사하고 스캔 뜨고, 마지막으로 컴퓨터로 뭔가를 하더니,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혹시 과태료나 벌금 안 낸 거 있거나, 재판 계류 중인 게 있나요?" 뭔 소리? 딱지 한번 안 뗐는데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자가용도 없으니 카메라 찍힐 일도 없는데...
"지금 신원조회에서 '미회보'로 뜨거든요. '적합'으로 떠야 바로 여권 발급이 진행되는데요." 하면서 뭔가 종이를 내밀더군요. 신원조회를 했을 때 '미회보'로 뜬 경우에는 '적합' 판정이 나올 때까지는 여권 발급이 보류된다는 겁니다. 조사 결과가 통보되는 데에는 2-3일 정도 걸리니까 그때쯤에 적혀 있는 번호로 조회를 해 보라는 겁니다. 아항. 왜 그런지 알았다... 15년 전 일을 가지고 아직도 발목 잡는구나.
옛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15년 쯤 전에 대학교 다니던 시절에 구속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노태우 시절이었는데, 요즘은 폐지하네 마네, 그러고 있는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나요? 이름은 참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대단한 일을 했던 것도 아니었죠. 그래서 실형을 받기는 했지만 2년도 안 되는 형이었고, 그나마 중간에 김영삼이 대통령 취임하면서 특사를 할 때 법무부 장관 이름 박힌 사면 복권장 받아서 교도소 문을 나왔습니다. 사실 전에 여권 만들 때도 시간이 상당히 걸렸습니다. 역시 그때도 신원 조회에 걸려서 경찰청으로 넘어가고, 그래서 경찰청에 가봤더니 "혹시 대학교 때 시위 전력 있으세요?" 하더군요. 그러면서 신원조사가 국가정보원까지 넘어갔기 때문에 여권 나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때는 장장 한 달이 지나서야 여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게 2000년 얘기입니다. 보수정권도 아니고, 자신도 내란 음모 누명 뒤집어 쓰고 사형선고 받았던 김대중 정권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권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디로 이사를 가면 꼭 경찰서에서 나옵니다. 이사 가고 나서 1-2주 있다 보면 꼭 집주인이 오거든요. 그러더니 관할 경찰서에서 형사가 나와서 이거저거 물어보고 갔더라면서 명함까지 보여주더군요. 한때는 제 후배 녀석하고 같이 산 적이 있었는데, 그 후배한테도 경찰이 와서 뭔가 물어보고 가더랍니다. 그리고 가끔은 부모님한테도 전화가 오더랍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하도 분통이 터져서 호통을 단단히 치셨나보더군요. 당신 자식 지금은 일 하면서 조용히 살고 있는데 왜 이딴 전화 자꾸 하냐면서, 그렇게 할 일 없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셨나봅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하는 말이, 나도 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느냐, 위에서는 그렇게 한번씩 체크하라는데. 미안하다. 하더랩니다. 그게 전두환 노태우 군사 정권이나 김영삼 때도 아니고, 이른바 '민주화'의 토양 위에서 세워졌다는 김대중 정권 얘기입니다.
그나마,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이사 간 다음에 경찰서에서 형사가 나오는 일은 없어졌고, 더 이상 부모님께 경찰서에서 전화도 안 오더군요. 그게 정권이 바뀌어선지 이젠 세월이 많이 지나서 감시의 '유효기간'이 지나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살았지요. 그런데 이번에 여권을 만들러 가서야, 아하. 이 정권도 아직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구나, 해서 참으로 눈물나게 '캄사한' 마음이 들더군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해서 명예회복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보상이나 생활 지원금도 지급합니다. 저는 그 신청 받을 시기에 그런 위원회가 있는 줄도 몰라서 신청을 못 했습니다만, 비슷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들 보상이나 생활지원금을 받은 걸 보면 저도 신청만 했으면 똑같이 인정은 받았겠죠. 하지만, 보상 받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면 뭐합니까? 뒤에서는 아직도 '전과자'라는 이름으로 음습한 감시의 손길이 뻗쳐 있습니다.
혹시나 나와 비슷한 경우가 있나 해서 찾아보니, 한겨레신문에서 <사면·복권돼도 여권발급땐 ‘전과자’>란 제목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 기사가 있더군요. 기사 링크 열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30년 전 박정희 시대 때 긴급조치 위반 관련자조차도 아직까지 신원조회 때 미회보로 걸린답니다. 경찰에서도 이게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는지, "사면 복권이 된 사람은 신원조회가 미회보로 뜨지 않도록 전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온 때가 작년 10월 말이니까 이제 석달이 지났는데도 제가 걸리는 걸 보면 아직 그 대단한 전산 프로그램이 개발이 안 됐나봅니다. 사면 복권 된 사람이 신원조회 미회보가 되지 않도록 하는 전산 프로그램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프로그램인가보죠?
보상? 생활지원금? 전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 돈 없어도 잘 삽니다. 그런 돈 나중에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그런 일 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민주화 관련 위원회는 여러 개 만들어 놓고서, 앞에서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라고 추켜 주면서 뒤에서는 여전히 전과자로 다루는 이 앞뒤 안맞는 태도는 참으로 한심합니다.
아마 신원조사 결과 별 게 없었는지(뭐 한 게 있어야 별 게 나오죠), 이틀 쯤 지나서 경찰청 신원반에서 문자가 왔습니다. 그나마 신원조사가 국정원까진 안 갔으니 김대중 정권보다는 나아진 거겠죠? 어쨌든 남들보다 1주일 가까이 여권이 늦게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보수언론들은 참여정부를 보고 '좌파 정권'이라고 합니다만, 저같은 보잘것 없는 놈한테까지도 감시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좌파 정권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한번, 내가 15년 전에 그런 일을 했지, 하고 먼지 쌓인 기억을 되새겨준 이 정부에 감사 말씀을 드리면서, 이미 나이도 먹고 세상의 때도 많이 묻은 그저그런 인간이지만 앞으로 그때 생각 하면서 좀 더 올곧은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나저나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이명박 정권은 민주화 운동 관련 위원회들을 통폐합한다는데,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면 그 손길도 확실히 거두어 주시죠. 경제도 살리셔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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