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적을 믿는다." 페르난도 알론소가 중국 그랑프리를 앞두고 한 말입니다. 물구덩이 속에서 벌어진 일본 그랑프리에서 치명적인 리타이어로 2 포인트까지 좁혔던 격차가 단번에 12 포인트로 벌어졌을 때, 알론소에게는 해밀튼을 따라잡을 가망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17 포인트나 벌어진 키미 라이코넨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웨트 레이스가 많았습니다. 일본에 이어서 태풍이 북상하고 있는 상황인 중국도 빗속에 시작된 레이스. 모든 차량들이 웨트(인터미디어트) 타이어를 장착한 가운데, 루이스 해밀튼은 좋은 출발을 보이면서 선두로 치고 올라갑니다. 해밀튼의 머리 속은 아주 홀가분했을 것입니다. 해밀튼은 일본 GP 때, 두번째 세이프티 카 발령 상황에서 과도한 가속과 감속으로 베텔-웨버 충돌 사건 원인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중국 GP 심사위원들에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최악의 경우, 일본에서 거둔 10 포인트를 날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결론은 무혐의. 행운의 여신은 다시 한번 해밀튼에게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출발 때 잠시 마사를 제치고 3위에 올랐던 알론소는, 키미를 잡으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3위 자리까지 도로 마사에게 내 주고 그 다음에는 마사 뒤에서 힘겨운 레이스를 펼치게 됩니다.




첫 스탑이 끝났을 때, 이미 해밀튼과 2위 키미는 상당한 격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알론소는 30 바퀴를 남겨 놓고 천신만고 끝에 마사를 제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해밀튼과 격차는 17초로 벌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마지막 경기인 브라질 그랑프리 결과에 관계 없이 이렇게 올해 챔피언십은 해밀튼에게 돌아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갑자기 장난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첫 스탑 때 탑 드라이버들은 타이어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트랙은 천천히 말라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소나기가 올 것이라는 예보 때문에 타이어 바꾸기를 주저했던 거죠. 어차피 차가운 상황에서는 마모도도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굳이 새 웨트 타이어로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모호한 상황에서는 트레드가 어느 정도 닳은 타이어가 오히려 접지면이 넓어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예상됐던 비는 오지 않고, 트랙이 계속 말라가면서 해밀튼의 웨트 타이어가 예상보다 심하게 마모되기 시작하면서 코너링이 불안해진 겁니다. 결국 해밀튼은 벌여 놓았던 격차를 순식간에 다 까먹고 결국은 몇 바퀴를 버티다가 라이코넨에게 선두 자리를 내 줍니다.





맥클라렌은 뒤늦게 해밀튼을 피트로 불러들이지만, 해밀튼은 결국 피트 입구에서 트랙을 벗어나서 그라벨로 빠집니다. 그라벨에 멈춰선 차량. 엔진은 살아 있었지만, 자갈밭에 빠진 차량은 더 이상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해밀튼은 단 한 번도 리타이어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웨트 레이스였던 유럽 그랑프리 때도, 트랙을 이탈했던 해밀튼은 엔진을 끄지 않고 끝까지 버틴 끝에 세이프티 카가 나온 상황에서 크레인의 도움을 받아서 트랙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해밀튼에게 참으로 질기기만 했던 행운의 동아줄이 상하이에서는 끝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해밀튼은 콕핏에서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고 어떻게든 머신을 다시 움직여 보고자 했으나, 결국 눈물을 삼키면서 스티어링 휠을 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은 바퀴 수는 25. 경기는 키미-알론소-마사 순서로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4위에는 정말 놀라운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레드불 B 팀인 토로 로소의 세바스티안 베텔이었습니다. 지난 일본 그랑프리에서도 예선 9위를 차지하면서 빗속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 베텔. 하지만 3위로 달리면서 포디움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만 사고 때문에 리타이어는 물론 10 그리드 페널티까지 받았다가 중국 GP 때 경고로 감면됐습니다만, 또다시 중국 GP 예선에서 다른 드라이버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5 그리드 페널티를 받았던 베텔이 4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오늘 토로 로소는 정말로 우승보다 더한 축제 분위기일 듯합니다. 베텔이 4위, 리우찌가 6위, 혼다까지 제치고 컨스트럭터 7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또한 베텔의 뒤를 이어서 올해 그렇게 죽을 쑤었던 혼다의 젠슨 버튼이 5위를 차지해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경기는 결국 상위 세 명이 그대로 순위를 유지하면서 마감됐습니다. 이로써, 해밀튼 107 - 알론소 103 - 키미 100 포인트가 됐습니다. 그리고 키미는 올해 제일 먼저 5승을 찍은 드라이버가 됐습니다.

중국 그랑프리 기간 도중에 알렉산드르 부르츠가 F1 레이스에서 은퇴한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아직 공식 발표는 되지 않았지만, 이번 시즌을 끝으로 부르츠는 더 이상 F1 레이스에서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확실시 됩니다. 윌리엄스는 부르츠에게 테스트 드라이버로 남아줄 것을 제안했다고 하는데, 과연 부르츠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네요. 또다른 윌리엄스 드라이버인 니코 로즈베르크는 알론소가 맥클라렌을 떠날 경우 그 자리를 채울 거라는 얘기도 있고, 내년 시즌 드라이버 시트는 자리바꿈이 꽤나 많을 것 같습니다.




정말 사건도 많았고 고달팠던 2007년 시즌도 단 한 경기만이 남았습니다. 챔피언 가망이 있는 드라이버는 해밀튼, 알론소, 그리고 키미입니다. 점수차는 해밀튼-알론소가 4점, 해밀튼-키미가 7점입니다. 해밀튼이 리타이어를 당하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키미가 해밀튼을 잡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키미가 우승을 한다고 해도, 해밀튼이 5위 안에만 들면 됩니다. 알론소는 일단 브라질에서 우승을 해야 합니다. 4점 차이라면 알론소가 우승, 해밀튼이 3위를 하면 동점이 됩니다. 이럴 때는, 우승 횟수 → 2위 횟수 → 3위 횟수... 이런 식으로 순위를 가릅니다. 알론소가 우승을 차지하면 알론소는 5승, 해밀튼은 4승으로 알론소가 챔피언을 차지하게 됩니다. 만일 알론소가 2위, 해밀튼이 5위를 차지하면 2위는 똑같이 5번이 되고, 3위도 똑같이 세 번, 4위도 똑같이 한 번이라서 동점입니다. 하지만 5위는 해밀튼이 브라질까지 두 번, 알론소가 한 번이므로 해밀튼이 챔피언이 됩니다. 알론소가 3위 또는 그보다 밑으로 처지고 해밀튼이 5위보다 아랫 순위에 머물면, 키미가 우승할 경우에 키미가 챔피언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여간, 지금 상황을 보면 확실히 여전히 해밀튼이 유리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알론소는 마지막 경기에 번 모든 것을 걸어볼 만합니다. 키미 역시도 7점 차이가 나긴 하지만 실낱같은 불씨를 포기할 순 없겠죠.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이 세 사람이 벌이는 마지막 결투는 두 주일 뒤에 열립니다. 과연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 : 버니 에클레스톤 (마지막 브라질 GP까지 흥행이 짭짤할 것이므로)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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