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OOXML이 ISO 표준 투표에서 부결됐습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이 OOXML 표준 문제가 국제 IT에서 상당한 이슈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결국 결과는 일단 MS가 패배했습니다. MS 쪽에서는 수정안을 가지고 내년 초에 다시 표준안을 제출할 듯합니다. 아무튼, 이 문제가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뜨거운 논란이 됐는데, OOXML을 찬성하는 분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던 듯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표준이 강제력을 갖는 약속, 즉 기준이 되는 경우는 국가적 차원에서 배타성을 가져야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ODF와 OOXML 표준은 그런 이슈가 아닙니다. 그냥 필요에 따라 만드는 스펙이고 약속들일 뿐입니다. 단지 국제 표준화 기구를 통해 합의되고 번호 붙여지는 약속이고, 규격이고, 문서일 뿐입니다. ODF가 ISO 표준이 되었다면, OOXML 같은 새로운 규격도 필요하다면 또다른 표준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 ISO입니다. 그냥 그렇게 계속 약속들을 합의해서 만드는 곳이 ISO입니다. ISO에 새로운 규격을 제안하고 표준안을 발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존 국제 표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또다른 필요한 약속을 만드는 통상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표준은 기준이 아니라 약속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 이성적 비판을 하시려면 좀더 객관적인 사실과 지식을 갖고 하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제가 궁금한 건, 그렇다면 도대체 ISO란 거창한 기구까지 만들어서 표준이라는 걸 만드는 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표준'이라는 게 '그냥 필요에 따라서 만드는 스펙이고 약속일 뿐'이라면 왜 국가별 표준화 기구가 참가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표준을 제정하며, ISO란 기구와 그 표준이 굳이 존재할 필요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죠. 나름대로 전통이 있는 워드퍼펙트 오피스가 자기들이 쓴다면서 WP XML 스키마를 들고 나오면 그것도 인정해 줘야 하겠죠. 맥에서는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iWorks를 많이 씁니다. 특히나 키노트는 외국에서는 프리젠테이션에 정말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키노트 때문에 맥북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키노트 XML 스키마도 표준으로 인정해 줘야 할까요? 그저 필요에 따라서 만드는 스펙이고 약속일 뿐이라면,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들을 인정해 주지 못할 이유가 뭡니까? '필요에 따라서' 말입니다.
표준이 하나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 거나 표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같은 분야에 대해서 표준은 적을 수록 좋습니다. 표준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의미는 퇴색되니까요. OOXML을 반대하는 이유는, 표준이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 아니죠. 아무 거나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표준이 땜질식으로 그때그때 이런저런 제품 쫓아가기에 급급하다면, 도대체 ISO란 기구가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ISO 표준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요? 이른바 '필요에 따라서' 그냥 표준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표준이라면, 언제 어떻게, 뭐가 또 나올지도 모르고 몇 개가 될 지도 모르는 표준을 지켜야 할 필요도 없어지고, '표준'이란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ISO란 기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막대한 예산을 낭비할 이유도 없습니다. 물론 표준은 필요하니까 그에 따라서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표준이란 말이 가지는 권위와 중요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아무 거나 표준으로 해서도 안 됩니다. 표준이 되었을 때 산업에 미치는 영향, 특히 공정 경쟁에 미치는 영향들은 중요하게 검토되어야 할 요소입니다. 특정 업체와 제품의 이익을 대변하는 스펙에 표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거기에다가 국제적인 권위를 얹어 준다면 과연 업계에서 그런 권위와 타이틀을 인정하려 들까요? ISO는 결국에는 권위를 잃게 될 것입니다. ISO 표준이란 말도, 무시해도 그만인 이름 뿐인 표준으로 전락하겠죠.
ISO란 이름이 권위를 갖고, ISO 표준이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아무 거나 표준으로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정 업체나 제품의 이익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전체 산업의 이익과 공정한 경쟁에 도움이 되는 표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ISO 표준이란 이름이 권위와 위력을 가진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OOXML을 위해서 ISO와 ISO 표준의 권위를 폄하하고 '표준'이란 말을 마치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는 상품권 같은 신세로 전락시키려는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게 MS가 노리는 것일 수도 있죠. ISO 따위 필요 없으니 그냥 우리 세상 안에서 살라는...)
강제성은 강제력으로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꼭 강제력이 없어도, 권위와 중요성이라는 개념들은 강제성을 갖습니다. 도덕이 법적 강제력이 없어도 사람들이 도덕에 대해서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도덕한 사람한테 비난의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약속이든 기준이든 표준이든 말하기 전에, 왜 ISO란 기구가 생겼으며, ISO 표준 하나를 제정하는 데에, 왜 각 국가 대표의 투표까지 거치는 복잡한 절차를 거치는지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지식'은 그런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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