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A 세계 모터 스포츠 평의회(WMSC)에서 맥클라렌의 수석 디자이너 마이크 코플란이 페라리의 기밀 문서를 받았다는 점에 대해서 죄가 있다고 밝혔지만, 이 기밀 문서로 팀이 이득을 보았는지에 대해서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당연히, 페라리에서는 이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쟝 토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격분하고, 이탈리아 언론들도 이에 합세했습니다. 모터스포츠계에서 여기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로 갈리고 있습니다. 르노 단장인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는, "죄가 있다면서 처벌이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페라리를 편들었고, 반대로 월드 챔피언 재키 스튜어트는, "팀이 모르는 상황에서 개인이 저지른 짓에 대해서는 그 처벌은 개인에 국한되는 것이 옳다"면서 WMSC를 지지했습니다. 한편 미카 살로는, 자신이 1999년에 다리 부상으로 결장한 미하엘 슈마허를 대체하여 페라리에서 드라이브할 때, 맥클라렌의 모든 무선 교신이 도청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이 문제가 되자, 살로는 "도청은 무선 혼선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무선 혼선이 그가 말했던 것처럼 "연습 주행이 끝날 때마다" 모든 무선 교신 내용이 그의 앞에 활자화되어 놓일 정도로 자주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는 지구를 넘어서, 은하계 안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무튼, 과연 페라리가 이렇게 격분하는 것이 정당할까요?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페라리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기에는 몇 가지 '결격 사유'가 있습니다.


불법 대 불법



쟝 토드는 WMSC 심리 과정에서 마이크 코플란이 나이젤 스텝니한테서 '움직이는 플로어'에 관련된 정보를 받았는 점을 인정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맥클라렌은 스파이 사건을 통해서 부정한 이득을 본 게 분명한데도, 처벌을 피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편 '움직이는 플로어'는 어떨까요? 쟝 토드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것 역시도 '부정한 이득'이 됩니다. 맥클라렌이 문제 제기를 하면서 FIA는 움직이는 플로어를 불법화하고 검사를 강화했습니다. 비록 검사에 통과했다고 해도, 이 장치 자체가 '움직이는 공기 역학 장치'에 해당되어 불법이며,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검사를 강화할 수 있다고 F1 기술 규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치가 불법이 아니라면 FIA가 검사 강화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곧, 맥클라렌이 부정한 정보를 받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페라리의 '움직이는 플로어' 장치를 불법화했다고 해도 이 장치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만약 맥클라렌에게만 그 책임을 묻는다면 거꾸로 불법 장치로 이득을 보려 했던 페라리는 왜 넘어가느냐? 라는 역공을 당할 수 있을 겁니다. 호주 그랑프리에서 키미 라이코넨이 거둔 압도적인 우승을 움직이는 플로어와 엮으려고 들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페라리는 그 장치가 금지됨으로써 이미 불이익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쟝 토드 역시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라리는 움직이는 플로어가 불법화된 다음에 내놓았던 성명, 그리고 인터뷰에서, "그 장치가 불법화되어도 우리에겐 거의 영향이 없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음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사실, 각 팀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 팀이 가진 약점을 캐내고 이를 FIA에 밀고하는 일이 많습니다. 때때로 FIA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장치들을 불법으로 퇴출시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과연 FIA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경기 기간 도중에 이루어지는 차량 검사는 그렇게 자세한 사항을 뜯어보기는 어렵습니다. 차량 검사는 경기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경기 기간 도중에 벌어지는 차량 검사는 차량 성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심한 검사는 잘 하지 않습니다. 레이스 뒤에 항의가 들어오거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그때는 좀더 자세한 검사를 할 수 있겠죠. 경기가 끝난 뒤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 한은 내부를 뜯어가면서 검사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끔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장치들을 불법화 하거나 하는 경우는, 뭔가 정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페라리 역시 깨끗하지 않은 출처를 가지고 맥클라렌의 장치를 불법화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결국 처벌이란 '불법인 것 같다'만 가지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불법'임이 명확하게 드러나야만 처벌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도 '부정한 이득'을 보려고 했던 페라리가 그렇게 기세등등할 자격이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움직이는 플로어를 금지당한 것이 불이익이라면, 기술 부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석 디자이너가 정직 처분을 받아 이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은 불이익이라고 볼 수가 없을까요?


페라리는 온당한 처벌을 받았던가



998년에 미하엘 슈마허가 자크 빌리누브를 일부러 들이 받았을 때, FIA는 슈마허에게 시즌 포인트 몰수라는 큰 처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과연이 겉보기에는 큰 이 처벌이 의미가 있는 걸까요? 슈마허 급의 드라이버에게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 같은 건 별 의미가 못 됩니다. 챔피언이냐 아니냐, 이것만이 의미를 가질 뿐이죠. 그나마도, 마지막 경기에서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에 이 처벌이 그에게는 경기에서 어떤 압박도 되지 못합니다. 만약 시즌 도중에 포인트를 박탈 당하는 사건이 터졌다면 남은 경기에서 심한 압박으로 다가왔겠습니다만, 시즌 끝나고 포인트 몰수 당하는 건 사실 별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한 처벌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마나한 처벌이었다는 거죠. 당시 슈마허와 빌리누브가 모두 리타이어하면 슈마허가 챔피언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빌리누브가 슈마허를 앞지르자 들이받은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데이먼 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석연치 않은 충돌 사고를 일으켜서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적이 있었던 전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처벌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위반은 했으나 이득을 보았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서 처벌을 받지 않은 사례는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팀은 페라리가 아니라 베네통입니다만, 페라리의 황금기를 합작한 로스 브론도, 나이젤 스텝니도, 심지어는 마이크 코플란도 베네통에서 한솥밥을 먹던 시절이죠. 게다가 지금 쟝 토드의 편을 들고 있던 플라비오 브리아토레는 당시에 베네통 팀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미하엘 슈마허도 이 팀에 있었습니다. 아일톤 세나가 세상을 떠난 1994년에 미하엘 슈마허는 베네통 팀에서 첫 월드 챔피언으로 등극합니다. 미하엘 슈마허 팬들 가운데서는, 당시 10기통 엔진을 얹은 머신들을 누르고 성능이 떨어지는 포드 8기통 엔진으로 우승한 사실을 슈마허의 실력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꼽곤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죠. 베네통에서는 당시 불법이었던 트랙션 컨트롤을 썼다는 점입니다. 트랙션 컨트롤이 있으면 코너에서는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됩니다. 코너서는 사실 8기통이냐 10기통이냐 하는 출력 차이보다는 코너링 성능이 얼마나 좋은가에 훨씬 많은 비중이 가게 되죠. FIA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트랙션 컨트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런 처벌이 없었죠. 첫째로는 이것으로 어떤 이익을 보았는지가 당시로서는 불분명했고 둘째는 언제부터 이 장치를 썼는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프랑스 GP 때부터 이 장치를 썼다는 사진 증거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그 당시에는 어영부영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WMSC가 맥클라렌에게 내린 판정처럼, "불법이지만 어떤 이득을 보았는지 불분명하니 처벌할 수 없다"는 식이 된 겁니다.


페라리였다면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쟝 토드는 "페라리였다면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고까지 말하지만 이것 역시도 그다지 설득력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 오죽하면 FIA에게 maFIA라는 별명이 붙었을까요? 페라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FIA 편을 드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콩코드 협정 개편을 앞두고 자동차 회사들은 수익 배분과 규정 개정을 놓고 FIA와 의견 차이를 보이고, 급기야는 페라리와 다임러크라이슬러, BMW를 비롯한 자동차 회사들이 뭉쳐서 GPWC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러나, 이 대결 구도에서 가장 먼저 FIA편으로 말을 갈아 탄 팀이 바로 프란싱 호스, 페라리입니다. 페라리는 FIA-FOCA 편에 붙으면서 추가 수익 배분을 약속 받았습니다. FIA와 페라리의 밀월 관계는 F1에서는 워낙에 유명한 얘기입니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페라리는 F1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팀이고,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페라리가 없는 F1,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요? 맥스 모슬리가 축구처럼 F1에서도 1부/2부 리그를 두어 1부 리그 하위리그를 2부 리그로 강등시키고, 2부 상위팀을 1부로 승격시키는 아이디어를 계속 밀었을 때, 이를 비웃는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페라리 팩토리에 불이라도 나서 순위가 꼴찌가 된다면, FIA가 페라리를 2부 리그로 내려보낼 수 있을까?" 작년에도 이탈리아 그랑프리 예선에서 심사위원들은 페르난도 알론소가 페라리의 펠리페 마사를 가로막았다는 이유로 10 그리드 페널티를 내렸습니다. 이 때, 재키 스튜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100 미터 앞에 있는 차량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F1 드라이버 자격이 없다."
Posted by MP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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