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포뮬러 1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터졌습니다. 페라리의 핵심 미케닉 가운데 하나인 나이젤 스텝니가 파괴공작과 산업 스파이에 연루되어서 페라리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나이젤 스텝니가 빼낸 정보를 받은 사람이 바로 맥클라렌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이크 코플란이라는 뉴스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전 글에서도 한번 밝혔습니다만, 로스 브론과 미하엘 슈마허가 페라리를 떠난 뒤로 스텝니는 새로운 기술 조직에 대해서 자주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결국 올해에는 그가 페라리를 떠나서 혼다로 간다는 소문들이 돌았는데, 몇 주 전에 놀랍게도 스텝니가 페라리로부터 고소를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이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텝니는 페라리의 황금 시절을 일군 드림 팀 가운데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케닉으로서, 그리고 미케닉 집단을 이끄는 리더로서 페라리에게 많은 신임을 받아 온 스텝니는, 특히나 2000년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피트 스탑 때 롤리팝을 맡았다가 슈마허가 나가면서 그만 그를 치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작년에 슈마허와 로스 퇴진에 즈음하여 페라리와 급작스럽게 사이가 틀어지더니 이제는 꼼짝 없이 산업 스파이로 몰리는 신세가 됐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가 빼낸 것으로 추정되는 정보를 받은 사람이 마이크 코플란이었다는 점입니다. 코플란은 90년대 초에 베네통과 페라리에 있었기 때문에 역시 같은 팀에 있었던 나이젤과는 잘 아는 사이일 것입니다. 물론 코플란은 디자인 사무실 소속, 나이젤은 현장 미케닉 쪽이기 때문에 많은 교류가 있지는 않았을 것으로는 보이지만, 어느 정도 친분 관계는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어떤 정보였을까?
아직까지 이 문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여럿 있습니다. 첫번째 의심스러운 점은, 코플란의 집을 경찰이 수색했을 때 페라리 것으로 보이는 문서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궁금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정말로 고급 정보였다면 과연 코플란이 허술하게 집에다 문서를 놔뒀을까 하는 점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용을 보았다면 폐기처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텝니가 고소당했다는 얘기는 이미 몇 주 전에 나왔으며, 코플란의 집이 압수수색 당한 것은 최근 일입니다. 상당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코플란이 문제의 문서를 없애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설계도와 갈은 부분들이라면 얘기는 달라지지만, 과연 보안이 철저한 페라리 같은 탑 클래스 팀에서, 설계 관련 일을 하지 않는 스텝니가 설계도에 접근할 권한이 있을까, 하는 점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테스트 데이터와 같은 정보들은 충분히 유출될 확률이 있습니다.
페라리는 아마도 스텝니를 진작부터 감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보도에 따르면 코플란에게 문서가 넘어간 시점이 4월 말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마라넬로와 영국의 워킹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스텝니와 코플란이 직접 만났을 리도 없고, 이런 기밀 문서를 스텝니가 그냥 우편으로 '수신 : 마이크 코플란'이라고 써서 곧바로 보냈을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몇 차례 중간 세탁 과정을 거쳤던가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문서가 넘어갔을 텐데, 그럼에도 문서가 코플란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페라리가 밝혔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스텝니에 대해서 감시가 들어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두번째 의심스러운 점은, 스텝니는 진작부터 혼다 쪽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만, 맥클라렌 이적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오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로스 은 맥클라렌 이적설이 있었습니다만, 스텝니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위나 명성으로 볼 때 돈으로서는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스텝니가 왜 혼다가 아니라 맥클라렌의 코플란에게 문서를 넘겨 줬을까요? 단순히 친분 관계 때문일까요? 하지만 둘은 그렇게 절친한 사이도 아니고, 밀접하게 붙어서 일한 사이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스텝니가 왜?
현재 스텝니가 받고 있는 혐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코플란에게 문서를 넘겨준 것, 또 하나는 올해 모나코 그랑프리 전에 레이스 차량의 연료 탱크 주변에서 발견된 이상한 흰 가루를 뿌린 파괴공작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의문으로 남습니다. 스텝니는 쟝 토드, 로스 만큼이나 페라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내부에 대해서도 깊숙하게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페라리의 보안 수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며, 곳곳에 CCTV가 감시를 하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 CCTV에 찍힐 만한 허술한 짓을 했다는 것은 쉽게 설명이 가지 않습니다. 일부러 자신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마음 먹지 않은 한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텝니가 그랬을까요?
첫번째 가능성은, 복수심이 불탄 나머지 걸려도 좋다는 식으로 일을 벌인 것이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그는 혼다로 이적하기 위해서 논의를 하고 있었지만, 페라리에서 계약을 이유로(2007년 말까지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개편된 기술 조직에 대한 불만에다가 이적까지 좌절된 스텝니가 복수극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올해 가장 큰 라이벌인 맥클라렌으로 기술 정보를 넘겨버림으로서 제대로 뒤통수를 치겠다는 심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그 뒤에 몰려올 파장이 너무 큽니다. 자신이 쌓아온 모든 명성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림은 물론, F1에서 아예 퇴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가능성은, 실제로 스텝니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 스텝니가 주장하는 대로 '더러운 조직적 음모'에 말려들었을 가능성입니다. 스텝니의 말하는 '더러운 조직적 음모'는, 페라리 팀이 공공연하게 조직을 비판한 스텝니에게 음모를 꾸며서 그의 명성에 먹칠을 하려 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스텝니와 코플란의 집이 압수 수색을 당했고, 의심스러운 증거물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게 어떤 경로로 어떻게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스텝니가 계획한 것으로 보이기에는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 허술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페라리가 음모를 꾸몄다고 말하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크긴 합니다. 스텝니 하나 작살 내자고, 증거물을 조작하고, 다른 팀의 핵심 직원까지 엮어서 음모를 꾸몄다? 쉽게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만약이 이게 음모로 들통나면 페라리는 끝장입니다. 팀 안이라면 몰라도, 다른 팀의 핵심 인물까지 음모에 끌어들인 게 들통나면 페라리는 쌓아은 모든 명성에 깡그리 먹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위험한 음모론입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인물도 아니고요.
유출된 정보의 가치는?
유출된 정보가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페인 그랑프리 뒤에 모나코부터 미국까지 페라리를 압도한 맥클라렌의 전력을 기술 유출에 연관시키고 싶어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술 유출이 4월 말에 이루어진 것을 감안하면 너무 시간이 빡빡합니다. 어떤 팀이든 머신에는 '개념'이 있습니다. 차체와 공기역학적 장치를 시작으로, 엔진, 트랜스미션, 브레이크와 서스펜션, 모든 것들은 서로가 팀들이 저마다 가진 개념'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곧, 다른 팀의 어떤 한 부분이 좋아보여서 그걸 바로 끼운다고 해서 당장에 같은 효과를 낼 수도 없고, 오히려 상성이 맞지 않아서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팀들은 새시의 공기역학 특성을 끊임없이 개선합니다. 이렇게 개선된 부분들은 경기 때에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다른 팀들은 쓸만한 부분들을 곧바로 따라하게 됩니다만, 그렇다고 당장 똑같은 성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주에 바로 '베낀 부품'이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남의 것을 자기 것에 적용하려면 먼저 자기 머신에 이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 재설계를 하고, 시뮬레이션을 하고, 팩토리에서 테스트를 거친 뒤에, 트랙에서 테스트를 거치게 됩니다. 충분한 데이터를 검토하고 문제점을 개선하고 나서야 비로소 트랙 위에서 적용이 되게 마련입니다. 이런 개발과 갱신이 쌓이고 쌓여서 비로소 성능 향상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페라리에서 유출된 기술 문서들이 당장 머신의 성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부품에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그게 적용되려면 올 하반기, 아니면 내년 머신에 적용될 겁니다.
물론 서킷 관련 최적화 데이터를 비롯해서 당장에 참고하고 써먹을 데이터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정확하게 문서의 내용도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서 지금은 이것이 맥클라렌의 성능 향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또는 앞으로 미칠지에 대해서는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망
아직까지는 사건의 자세한 내용이 별로 드러난 게 없습니다. 코플란의 집에서 증거물이 발견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맥클라렌이 페라리가 맥클라렌 직원이 관련 사실을 발표하기 전에 코플란을 정직 처분을 내렸다는 사실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적어도 코플란이 연루되었다는 것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맥클라렌으로서는 이 일은 코플란 개인 문제이지 팀이 조직적으로 연계된 일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겠죠.
이번 일로 페라리는 어느 정도 조직 안에서 충격과 트러블은 있겠지만, 그래도 라이벌 팀이 연루된 것에서 어느 정도 위로는 받을 수 있겠습니다. 올해 설령 챔피언십 우승을 못한다고 해도, 무언가 변명할 거리가 생겼으니까요. 반면에, 맥클라렌으로서는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년 머신 개발도 그렇고, 올해도 라이벌 페라리와 맞서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개발과 개선 작업이 필요한데, 이 상황에서 수석 디자이너가 정직 처분을 받았으니 기술 스태프 안에서는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과연 이 문제가 맥클라렌의 성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주 영향이 없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맥클라렌은 탄탄한 조직을 보유하고 있지만, 애드리언 뉴이가 떠난 다음 해인 2006년에 단 1승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죽을 쑨 것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타격을 예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반면 이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페라리 직원 두 명이 토요타로 이적하면서 기술을 유출시킨 사건이 유죄 판결을 받기까지는 4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고, 이 사건은 더욱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스텝니도 혐의를 부인하고 '더러운 조직적 음모'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F1의 오랜 라이벌, 페라리와 맥클라렌이 엮인 '스텝니게이트'는 당분간 F1에서 시끄러운 잡음과 의혹을 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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