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정부에서 <1250 친서민 생활표준화 계획>이란 걸 내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업체별로 제각각인 휴대폰 배터리 표준화,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 노트북 어댑터 표준화, 전국 교통카드 표준화와 같은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표준화된다면 상당히 쓸모 있을 것들도 많이 있지만 과연 표준화가 필요할까 싶은 것도 있는데, 특히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가 그렇습니다.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은 업체별로 개발되어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업체들이 있습니다. 삼성의 천지인과 LG의 나라글이 아마도 가장 대표적일 것입니다. 두 가지를 써 보며 천지인은 배우기가 쉽고 직관적인 장점이 있고, 나라글은 일단 익숙해지면 입력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풀 터치폰이 많아지면서 모아글과 같이 터치 스크린의 특성을 활용한 입력 방식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아직 휴대폰은 기기도 그렇고 한글 입력 방식도 개발되고 발전될 여지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표준'이란 이름으로 획일화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하는 점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물론 업체 관계 없이 똑같은 한글 입력 방식을 쓴다면 기계를 바꾸면서 다른 입력 방식을 배워야 하는 불편은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발전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입력 방식의 개발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널리 쓰이는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은 어느 수준으로는 직관적이고 단순하기 때문에 배우고 적응하는 데 어렵지 않습니다.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 이전에, 80년 초에 컴퓨터 키보드 한글 입력 방식 표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많이 쓰이던 입력 방식은 2벌식과 3벌식이었지요. 2벌식은 독수리 타자를 치기에 좋고 자음과 모음이 한 벌씩이므로 구조가 간단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3벌식을 처음에는 조금 까다롭지만 키보드 연타가 적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입력속도가 빠르고 손에 무리가 덜 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2벌식 입력기는 '도깨비불'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모음 다음에 자음이 입력될 때 이게 받침인지 다음 글자의 초성인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바다'를 입력하면 [ㅂ→바→받→바다]와 같은 식으로 '바' 다음에 나오는 'ㄷ'이 일단 받침으로 붙었다가 다음 입력되는 글자가 자음이냐 모음이냐에 따라서 다음 글자로 옮겨 붙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보기에도 헷갈리고 입력기도 까다롭게 만드는 이상한 입력 방식이 됩니다. 그런데 결국 표준 키보드는 2벌식으로 정해집니다. 물론 그 전부터 2벌식의 비율이 더 많긴 했지만 국가 표준으로 2벌식이 굳어지면서 3벌식은 급속도로 위축됩니다. 물론 윈도우나 리눅스를 비롯한 운영체제, 아래아한글과 같은 프로그램들에서 3벌식을 지원하긴 하지만 3벌식 키보드가 자취를 감췄으니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3벌식을 선택할 여지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3벌식이란 게 있는 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요.
물론 영어 키보드에서 쿼티보다 드보락 자판이 더 입력 속도가 빠르지만 쿼티가 대세인 것처럼 한글 역시도 표준 여부에 관계 없이 3벌식보다는 2벌식이 더 널리 쓰이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컴퓨터를 많이 쓰고 한글 키보드 입력을 많이 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3벌식이 손에 무리가 덜 가고 속도도 빠른데, 소비자의 선택도 아니고 정부가 2벌식을 표준으로 획일화함으로써(표준 제정 전에는 컴퓨터 사용자들 중에 3벌식을 쓰는 비율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전문가들 중에서는 3벌식을 미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3벌식에 대한 접근을 거의 막다시피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휴대폰의 경우에도 입력 방식으로 본다면 나라글보다는 천지인 쪽이 연타가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같은 키를 연속해서 누르는 연타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가락에도 무리를 많이 줍니다(마우스를 쓸 때도 더블클릭이 가장 손가락에 무리를 많이 주지요). 그렇다면 자신에게 맞고 편리한 입력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나마 컴퓨터는 운영체제나 소프트웨어에서 다른 입력 방식을 지원하여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나마 있고 키보드가 2벌식밖에 안 나온다고 해도 블라인드 타이핑으로 어떻게든 다른 입력 방식을 쓸 수 있겠지만 휴대폰은 그럴 여지조차도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어댑터나 휴대폰 배터리는 하드웨어 문제지만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은 소프트웨어에 대한 문제이고 사용 습관에 관한 문제입니다. 또한 '손의 건강'이라는 인체공학 문제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풀터치 폰의 모아글과 같이 기기 발전에 따라서 더 발전될 여지도 많고, 입력 방식 사이에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어서 존재 가치가 있는 휴대폰 한글 입력 방식을 무리하게 획일화시키는 것보다는 현재 입력 방식 1, 2위인 천지인과 나라글을 로열티 없이, 또는 낮은 로열티로 다른 업체들이 쓸 수 있게 개방하도록 유도하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완전히 시장에 풀어주게 되면 결국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쪽은 자연스레 위축되고 도태될 겁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용자들에게 선택 받는 방향으로 일을 풀어가는 편이 정부에서 무리하게 획일화해서 오히려 경쟁과 발전 여지를 억눌러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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