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국무총리가 취임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한 달 동안 정 총리가 제대로 한 일이라고는 '세종시 뒤집기' 밖에 없습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우리나라 경제학계에서 나름대로 알아주는 학자라는 이 분이 취임해서 지금까지 이 정부가 입만 열면 떠들던 경제 문제에 대해서 뭘 했나, 가만 생각해 보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오히려 정식 정부 부처에 몸담고 있지도 않은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강만수 얘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들어서 한국 경제에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거시 지표가 잇따르자 강만수가 어깨에 힘 주고 다니면서 "거 봐 이게 다 내 덕분이라니까"라고 으스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허수아비로 보일 정도로 별 존재감을 갖지 못하는 가운데 강만수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출구전략을 놓고 기싸움을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판입니다.

여기서 좀 의문을 가져 보게 됩니다. 저명한 경제학자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존재감이 없이 세종시 문제에만 올 인하고 있는 정 총리의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물론 세종시 문제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국무총리 자리에 있는 사람이 다른 문제에는 놀랄 만큼 존재감이 없이 오로지 세종시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 정 총리의 모습은 국무총리가 아닌 '세종시 뜯어고치기 위원장'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아무리 봐도 '경제 문제는 강만수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넌 경제는 신경 꺼라'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총리 자리에 앉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뒤돌아보면 이명박 정부가 한승수 총리의 후임으로 정운찬을 내정하고 나서 뒤이어서 갖가지 의혹이 터져 나왔습니다. 소신 있고 청렴한 경제학자와 같은 이미지는 청문회에서 줄줄이 쏟아진 의혹 앞에 무너져 내리고 총리 자격이 없다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정 총리를 뚝심 있게(?) 총리 자리에 앉혔습니다. 정운찬 총리 청문회 전에 천성관 검찰총장 내정자가 스폰서 의혹을 비롯한 온갖 의혹에 시달리다가 결국 낙마했기 때문에 도덕성 문제가 상당히 중요했던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얼마든지 청와대와 사정 기관의 정보력으로도 충분히 수집할 수 있는(다시 말해서 알고도 남았을) 정 총리의 각종 법률 위반과 의혹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비난을 무릅쓰고 총리 기용을 강행했습니다.

정 총리가 한때 민주당 대권 후보로 거론됐다는 점, 그리고 충청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애초부터 정 총리는 세종시 전용으로 기용된 '원 포인트 릴리프 투수'였다고 봐도 좋을 것입니다. 애초부터 이명박 대통령은 정 총리에게 다른 일은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승수 전 총리도 말만 총리지 알고 보면 있으나 마나한 얼굴 마담에 불과했던 것은 기억하실 겁니다. 고소영 라인도 아니고 오히려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는 정운찬에게 총리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을 쥐어줄 리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김영삼 정권 시절 이회창 총리와 같은 꼴이 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정 총리의 각종 의혹은 오히려 이명박 정권에서 보자면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됩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정 총리의 의혹들은 청와대와 사정기관의 정보력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이런 온갖 문제점들을 몰랐을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세종시 뒤집기를 위한 총알받이 총리가 필요했을 정부로서는 이런 비리들이 오히려 정 총리를 길들이고 총알받이로 삼을 좋을 미끼가 되는 셈입니다.

사실 총리가 되기 전에 정운찬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소신있는 교수고, 저명한 경제학자이고, 구태 정치인과는 다른 깔끔한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총리로 내정되면서 그 전까지는 비판해 왔던 4대강 살리기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결국은 부나방처럼 권력의 떡고물이나 쫓아다니는 지식인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청문회에서 잇따른 법률 위반과 의혹이 불거지면서 그의 좋던 이미지는 다 망가졌죠. 지난 대선 때 민주당 후보로 거론되고 정운찬 자신도 은근히 출마할 뜻을 비쳤을 때 "주위를 기웃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투신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가 정말로 소신 있고 깔끔한 학자였다면 청문회에서 그 많은 의혹으로 난타당하면서 망신당했을 때 창피해서라도 총리 자리를 내 놨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금방 들통날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구태 정치인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면 정 총리는 상당히 정치적 야망이 강했던 사람이란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결국 세종시 뒤집기를 위한 총알받이 총리가 필요한 이명박 정권과,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정운찬은 상당히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더구나 정 총리의 의혹은 그를 입맛대로 조종하기에 상당히 좋은 미끼가 되는 셈입니다. 어쩌면 정운찬이 정말로 별 의혹이 없는 깨끗한 인물이었다면 그를 총리로 앉히기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이회창 전 총리처럼 대통령과 충돌하고 결국은 결별하면서 소신 있는 대쪽 인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힐 수 있었을 테니까요.
Posted by MP4/13

BLOG main image
Drive with your sense. by MP4/13
Add to Technorati Favorites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02)
광속질주 (205)
취생몽사 (160)
주지육림 (3)
독서삼매 (10)
음담패설 (28)
전광석화 (146)
우매상자 (66)
포장후면 (20)
악마사전 (6)
팔도유람 (20)
혹세무민 (508)
일상포착 (30)
Total : 3,916,400
Today : 77 Yesterday : 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