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이명박 정부의 두번째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습니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의 후보로 거론되면서 어쩌면 이명박과 대권을 놓고 맞대결을 벌였을 지도 몰랐던 정운찬 총장을 총리로 영입한 데에는 물론 이명박 정권의 계산이 깔려 있는 셈입니다. 심대평 총리 기용과 세종시 축소 문제를 둘러싼 충청권 민심을 끌어안는다는 점. 어느 정도는 이명박 정권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보였던 인물을 총리로 앉힘으로서 '나도 반대파를 끌어안을 줄 안다'는 과시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권 후보로 떠올랐던 인물이 바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입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총리로 발탁되었다가 결국 YS와 날을 세우면서 부딪친 끝에 경질됨으로써 오히려 '대쪽'이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여당의 대권 후보로 두 번이나 당선되었지요., 정운찬이 이런 이회창의 시나리오를 리메이크 하기에는 지금이 상당히 좋은 타이밍입니다. 10월 재보선이 여당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면 내년도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사이는 급속도로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침몰하는 타이타닉 같은 이명박과 한 배에 있어 봤자 자기들도 결국 같이 침몰할 게 뻔하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이명박에 대해서 각을 세우면서 대립하는 구도로 갈 공산이 커집니다.
여기서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이명박 지지율이 요즘 40%를 넘고 있는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몸을 사리고 고개를 좀 숙이는 모습을 보일 때에는 지지율이 올라갔다가, 밀어붙이기 버릇이 나오면 바로 지지율이 꺾이는 모습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40%까지 지지율이 올라간 것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달리 김대중 전 대통령 때에는 국장도 받아들였고 서울광장도 분향소로 개방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바가 큽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명박으로서는 지금의 높은(?) 지지율이 꼭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자칫 40% 지지율은 조기 레임덕을 몰고 올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은 자신의 스타일대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어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렇게 하면 또다시 지지율이 떨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역시 넌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나아'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어정쩡한 상황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40%가 넘어가는 지지율은 자신에게는 운신의 폭을 좁히는 아킬레스 건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이명박은 중도실용과 친서민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러자면 막대한 예산을 블랙홀처럼 쓸어가는 4대강 살리기 사업부터 포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명박은 관료들에게 잡아먹히면서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해 버리는 겁니다.
어쨌거나, 지금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가 가장 유력한 후보이지만 막상 대선이 현실로 다가오면 아직까지 한국 사회, 특히 고령층을 위주로 하는 보수층에서는 "여자가 국군 최고 통수권자가 된다고?"라는 네거티브 전략이 잘 먹혀들어갈 확률이 높습니다. 당내 지지 기반이 별로 없었던 이명박이 총선 참패 이후 당 대표직을 맡아서 선거마다 승승장구했던 박근혜를 꺾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운찬이라는 인지도 높은 인물은 한나라당에게는, 특히 친이계 쪽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총리를 역임함으로서 행정 경험을 쌓고, 처음에야 말을 잘 듣는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갈수록 이명박과 각을 세우면서 소신있는 모습까지 보여준다면(가장 좋은 건 아예 잘리는 거죠) 정운찬은 차기 대권 후보로 김문수와 같은 어중간한 인물들을 밀어내면서 크게 떠오를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어느 정도는 개혁 성향을 보여줌으로써 2-30대에서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한나라당 친이계 세력에게는 포스트 이명박으로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인물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정운찬이 이명박과 각을 세우면서 이회창과 같은 '소신' 이미지를 갖추는데 왜 친이계가 정운찬을 지지할 것이냐고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친이계 가운데 진짜 이명박의 측근은 얼마 되지 않죠. 오히려 어느 쪽이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인가를 눈치 보면서 확률 높은 쪽에 붙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10월 재보선과 지자체 선거를 거치면서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가망 없는 이명박은 버리고 정운찬이나 다른 인물로 갈아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여정부 때 많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노무현을 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게 정치죠. 하여간에 서로 다른 야망을 가지고 있는 이명박과 정운찬의 게임이 앞으로 꽤나 흥미진진할 겁니다. 물론 그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는 건 국민들이라서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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