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미 라이코넨의 2007년. 지금까지는 한 마디로 '우울'입니다. 다른 어떤 드라이버들보다도 월등히 많은 연봉을 받는 드라이버로서, 기대했던 모습들은 호주 그랑프리 우승 뒤로는 그다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챔피언십 타이틀은 그 확률이 많이 사라졌고,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던 팀 동료 펠리페 마사와 비교해도 상당히 포인트가 처져 있습니다. 이제는 올해를 끝으로 페라리에서 퇴출될 것이며, 이미 페라리는 키미의 자리를 대신할 인물을 찾고 있다는 뉴스까지 나오고 있는 판입니다. 여러 전문가들도 올해 키미의 모습에 실망하고 그의 능력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그야말로 우울한 상황이 되어 버린 키미,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키미의 잘못이나 능력 부족일까요? 그러기에는, 키미가 맥클라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챔피언을 두 차례 아깝게 놓치면서 챔피언 우승에 실패했지만, 분명 그가 보여 주었던 놀라운 드라이빙 실력은 그를 쉽게 평가절하 하기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올해 키미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제 나름대로 그 이유를 따져 보겠습니다.
키미 라이코넨과 매니저인 데이빗 로버슨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바로 '페라리로 간 것'입니다. 페라리가 나쁜 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페라리는 슈마허를 5연속 월드 챔피언으로 올려놓은 팀입니다. 이런 팀이 나쁘다면 제 머리가 나쁜 거죠. 다만, 키미의 성격과 페라리의 성격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미하엘 슈마허가 들어오기 전, 페라리는 항상 좋은 팀이긴 했지만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는 팀이었습니다. 미하엘 슈마허는 혼자서 온 게 아니죠. 로스 , 쟝 토드를 비롯한 네통 시절 스태프들을 잔뜩 끌고 들어왔습니다. 한마디로 페라리를 미하엘 슈마허의 팀으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한 관계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전 페라리는 이탈리아 기질을 가지고 있는 팀이었다는 겁니다. 잘 하긴 하지만, 어딘가 구석구석까지 꼼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슈마허가 들어오면서부터는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밤늦게까지 엔지니어들과 붙어서 함께 일하면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슈마허. 그리고 베네통에서 챔피언의 맛을 본 스태프들은 페라리를 모든 부분에서 철두철미한 팀으로 변신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슈마허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전문가들은 과연 페라리가 슈마허 시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서서히 예전 페라리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걱정을 했습니다. 특히나 페라리에서 몸을 담았던 니키 라우더 같은 인물들은 진작부터 키미에 대해서 여러 차례 경고를 했습니다. 곧, 페라리는 슈마허처럼 카리스마를 가지고 모든 것을 관리하고 틀어 쥐지 않으면 쉽게 풀어질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키미의 캐릭터하고는 영 맞지 않다는 게 문제죠. 맥클라렌은 론 데니스, 윌리엄스는 프랭크 윌리엄스, 그리고 르노는 브리아토레라는 강력한 카리스마 속에서 조직이 구축되어 있지만, 몬테제모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쟝 토드도 그들에게 미치지는 못합니다. 최근까지 페라리의 단장은 실질적으로는 미하엘 슈마허였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올해는 꽤 가망이 있었습니다. 올해 머신은 로스 이 총괄 지휘를 했던 것이고, 슈마허 체제 아래에서 만들어진 머신입니다. 그래서, "키미는 올해 챔피언을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지요.
게다가 키미는 루카 디 몬테제모로와 미하엘 슈마허 - 쟝 토드 진영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입니다. 곧, 슈마허 - 토드 진영에게 승리를 거둔 몬테제로모가 슈마허 대신 앉힌 인물이 바로 키미입니다. 펠리페 마사는 토드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쟝 토드의 아들이 바로 마사의 매니저지요. 하지만 키미는 별로 비빌 언덕이 없는 처지입니다. 토드로서는 마사와 비교해서 키미가 그렇게 달가울 수는 없습니다. 키미를 강력하게 후원하는 몬테제모로는 FIAT 그룹 챙기기에 바쁩니다. 지금 마라넬로의 팩토리를 틀어 쥐고 있는 단장은 쟝 토드입니다. 게다가 키미는 그렇게 사람들하고 금방 친해치는 붙임성 좋은 타입은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새로운 팀으로 간 첫 해에 당장 우승을 쓸어 담고 챔피언을 해라? 생각해 보면 이건 아주 무리한 요구입니다. 몇 년 동안 함께 한 팀을 떠나서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낯선 머신과 타이어를 가지고 레이스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또 한 가지 문제는, 이탈리아 언론들은 그렇게 참을성이 있는 매체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점은 니키 라우더가 진작에 걱정했던 점이죠. 키미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면 냄비 근성이 심한 이탈리아 언론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 거라고 걱정을 했죠. 그리고 그런 걱정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벌써 이탈리아 매체들은 키미가 그 많은 돈을 받고 페라리로 와서 과연 슈마허 후계자 노릇을 하고 있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초보나 하는 실수'라는 말로 출발 때 순위를 까먹는 문제를 꼬집으면서, 호주 때 말고는 빛이 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퍼붓고 있습니다.이런 비난들은 키미를 더더욱 난감하게 만들고 있지요.
사실 론 데니스는 키미를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심하다는 소리를 들어 가면서까지 매니저한테 각서까지 받아 가면서 그의 사생활을 컨트롤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론은 키미를 그렇게라도 틀어 쥐고 묶어 놓지 않으면 이 힘겨운 F1 바닥에서 그의 독특한 개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 쉽다는 걸 알고 있었죠. 하지만 페라리에서는 그렇게까지 그를 틀어쥐지는 않을 듯합니다. 결국 이 어려운 상황은 키미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고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키미가 일찌감치 페라리를 떠난다는 뉴스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F1에서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안 나는 법입니다. 적어도 뭔가, 관계자들 사이에 얘기라도 오갔다는 얘기죠. 물론 계약은 3년이지만, 서로가 사이가 벌어진다면 계약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서로에게 아무 것도 도움이 안 된다면 빨리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요. 만약에 키미가 팀을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팀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네요.
첫째는, 카리스마를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는 단장이 있는 팀입니다. 맥클라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마리오 타이센이 있는 BMW도 괜찮을 겁니다. 플라비오 브리아토레가 있는 르노도 괜찮을 겁니다. 윌리엄스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둘째는, 알아서 키미의 마음 속을 꿰뚫어볼 수 있는 기술 감독이 있는 팀입니다. 키미는 원래 피드백을 그다지 자세하게 많이 하는 드라이버가 아닙니다. 엔지니어들이 그의 한 마디에서 열 마디를 파악해서 알아서 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페라리의 기술 조직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습니다. 로스 은 쉬는 중이고, 지금 기술 감독은 인력 관리를 하던 인물입니다. 지금 페라리의 기술 조직 구조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나도 쉬고 싶다'고 말했던 나이젤 스텝니는 범죄 혐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렇듯 최근 페라리는 조직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키미의 피드백을 파헤쳐서 제대로 머신에 반영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키미는 계속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만약 키미가 팀에 남는다면, 그리고 그가 페라리에서 월드 챔피언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방법은 단 하나. 자기가 페라리에 맞춰야 합니다. 페라리란 조직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을 테니까요. 한마디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페라리란 조직을 틀어 쥐어야 합니다. 엔지니어들과 밤샘도 불사하면서 페라리에 있는 '슈마허의 사람들'을 '키미의 사람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만, 페라리에 있는 한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축구는 팀 멤버가 모두 제몫을 해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잘난 스트라이커 혼자서 골 넣는다고 이기는 게 아닙니다. 미드필드, 수비수, 골키퍼가 자기 몫을 해야 하며, 작전을 짜는 감독, 코칭스태프, 관리 인력들도 모두 제 구실을 해야만 합니다. F1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를 타고 승리를 거두는 것은 드라이버지만, 잘난 드라이버 혼자서는 챔피언이 될 수 없습니다. 피트 크루, 미케닉, 단장과 작전 팀, 테스트 팀, 팩토리의 기술 개발 인력과 관리 인력, 이 모든 이들이 팀웍을 가지고 제 몫을 해야만 드라이버는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올해 팀을 옮긴 알론소가 키미. 이 둘 사이에 있는 한가지 눈에 띄는 차이점이라면, 알론소는 최대한 팀에 빠르게 정착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라이코넨이 1월 말에 가서야 테스트를 시작한 것과는 대조되게, 알론소는 브리아토레를 졸라서 2006년 말 마지막 테스트에서 맥클라렌 머신에 올라탔습니다. 이건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일찍 맥클라렌 머신을 탐으로써, 개발에 도움을 주고 적응을 빠르게 하는 것? 그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난 이미 맥클라렌 사람이고, 맥클라렌에 못 가서 안달난 사람이오!"라고 말하는, 말없는 메시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람들과 빠르게 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새로운 팀에 꽤 빠르게 정착해 가고 있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알론소는 "아직도 완전히 편한 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에 적응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아마 키미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페라리도 이 새로운 개성을 가진 드라이버에 적응해 나간다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이탈리아란 곳이 그다지 참을성이 많지는 않단 말이죠.
올해는 키미에게는 F1 드라이버로서, 또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되는 1년일 것입니다. 그가 자아도취에 빠져서 재능을 탕진해 버린 불쌍한 천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는가는 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차량 안에서 얼마나 잘 드라이브하느냐가 아닙니다. 차량 바깥에서, 팀의 일원으로서, 리더로서 얼마나 잘 해 나가느냐입니다. F1에 올라오기까지 그가 보여 주었던 빛나는 투지, 그리고 F1에서 쌓아 올린 눈부신 성과가 2007년에 허무하게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정착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과 발전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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