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마신 와인 반 병으로 아침에 한참 해롱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오랜 친구 녀석한테 걸려온 전화였지요. 술 마시자고 저녁 때 전화오는 경우는 봤어도 이렇게 꼭두새벽에 전화가 오는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솔직히 잘못 건 전화겠지... 하는 핑계를 대고 안 받고 그냥 이불 속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전화가 왔고, 안 받으니까 전화 좀 받으라고 문자가 왔습니다. 어라? 무슨 일이 있나본데? 싶어서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 보니 병원 응급실에 와 있다는 겁니다. 그나마 약간 남아 있던 잠기운도 확 달아났지요.
새벽에 몸이 영 이상해서 응급실에 왔는데 의사가 협심증 같다고 말하더란 겁니다. 아마도 오늘 내일 혈관확장술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갑자기 병원에 와서 그러니 만화책 좀 갖다 달라는 겁니다. 나참, 이 상황에서 생각나는 게 겨우 만화책이냐! 정말 팔자 좋은 인간이네... 아무튼 마침 그 친구가 입원해 있는 병원 근처로 갈 일도 있고 해서 집에 있는 만화책을 주섬주섬 챙겨서 갔습니다. 그러고 보면 낼 모레가 40인데 둘 다 아직 결혼은 커녕 애인도 없이 아파서 드러누웠을 때 만화책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유유상종인가 봅니다.
이튿날, 시술을 마치고 나올 때쯤 해서 병원에 가 보니 그 친구 말이 협심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다보니까 일시적으로 혈관이 수축되어서 협심증 비슷한 증상이 나온 것이고 별 이상은 없어서 확인만 하고 시술을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검사 결과 엉뚱하게 당뇨병이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뇨병에 걸리면 먹는 습관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잘 아실 겁니다.
"야, 와인 셀러 나한테 넘겨라."
"가장 아끼는 한 병 빼 놓고는 다 정리할 거다. 근데 셀러도 달라고?"
이 심각한 시점에서 이 대책없는 '내일 모레 40'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친구도 꽤 와인을 좋아해서 집에 와인 셀러까지 모셔다 놓고 꽤 괜찮은 와인들을 모으고 있었지요. 얼마 전에는 와인 동호회 사람들하고 1/n으로 해서 DRC의 로마네 썽-비방을 마시기로 했다나 어쨌다나... 그런데 당뇨병 판정을 받아 버렸으니, 아예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술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요.
집에 돌아와서, 어제 사다놓은 보졸레 누보를 마셨습니다. 2008년산입니다. 이제 2008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낼 모레가 40'이지만 이제 한달 반 남짓 지나면 '당장 내일이 40'인 나이가 됩니다. 정말로 늙어간다는 게 새삼 실감나는 때입니다. 그 값에 뭐 그딴 걸 먹냐는 와인 신도들의 얘기들을 뒤로 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걸 슬퍼하면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술친구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진 이 사태를 유감스러워하면서, 기어이 보졸레 누보 한 병을 다 비워버리고 잠이 들었지요.
아무리 돈이 많아서 로마네 꽁띠를 짝으로 사다 놓고 마실 수 있어도, 병 때문에 마실 수 없는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 수록 우리의 몸은 언제 어디서 탈이 날 지 모르지요. 건강 관리 철저하게 하고 운동 열심히 한다고 다들 불로장생하고 성인병 절대 안 걸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관리도 안 하면 오죽할까요? 갑작스럽게 "술은 절대 안 됩니다"라는 의사의 판정을 받고 모셔 놓은 와인을 처분해야 하는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 친구가 와인계에서 퇴출 처분을 받았지만 그 다음에는 제 차례일 지도 모르죠.
그러고 보면 정말 마시고 싶은 와인이 있어도 '나중에 여유 많아지면 마시자고... 지금은 돈이 없어서...'란 말은 어쩌면 허황된 얘기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여유가 많아졌을 때, 정작 내 몸이 술을 마실 수 없는 처지가 된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일까요? 물론 그렇다고 지금 여유도 없는데 빚 내가면서 무리하게 방탕하게 와인으로 탕진할 수야 없겠죠. 하지만 우리 인생은 무지하게 짧습니다. 그리고 설령 몸 자체가 와인을 못 마실 정도로 맛이 가진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많이 들면 감각이 무디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맛도, 향도, 예전만큼 느낄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러니 정말 마시고 싶은 와인이 있다면 딱 한 가지만 정해서 적금이라도 따로 부어서 마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후회하기 전에 말입니다. 저도 그래서 딱 하나만 정해 놓기로 했습니다. DRC 로마네 꽁띠? 아이고, 아무리 '딱 한 병'이라고 해도 그건 너무 심합니다. 사실은 DRC의 몽라쉐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그것도 로마네 꽁띠와 막상막하이니... 정말 끝내주는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급 샤르도네 하나 마음 속에 담아두려고 합니다. 아마도 지역은 몽라쉐가 될 것이고, 제 주제에 최대한 사치할 수 있는 정도로 하나 골라 봐야겠습니다.
어쨌거나,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은 두 가지를 항상 가슴 속에 담아 두고 살아야겠습니다.
첫째, 오랫동안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몸 괜찮을 때 관리 잘 하자.
둘째, 정말 마시고 싶은 와인이 있다면 꼭 마시자. 언젠가는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때가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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